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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곶감 Mar 01. 2022

어린 이

어린이집에서 공공근로를 시작했다. 매일 수업이 끝나고 어린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시간에 교구장을 소독하는 일을 했다. 마침 원감 선생님의 반을 소독하고 있는데, 노트북을 통해 어린이집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영상이 흘러나와 듣게 되었다.


교육 영상 속 강사는 어린이에 대해 높임말을 썼다. 어린이를 그분들이라고 지칭했고, 어린이의 행동을 높여서 설명했다. 이를테면 ‘만져 보셔야 한다.’, ‘궁금해하신다.’와 같은 식으로 표현했다. 강사의 말투가 생소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면서 고구마 활동이 생각났다. 고구마는 장애 어린이들과 함께 나들이 가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떠올린 날은, 활동 참여자인 장애 어린이와 함께할 자원 활동가를 대상으로 교육이 있었다. 새로운 자원 활동가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기도 했다. 그때 나는 ‘나이주의’에 대해 막 접한 참이었다. 그래서 고구마 활동에 참여하는 자원 활동가들은 함께 하는 장애 어린이들에게 반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나는 이미 1년 정도 활동을 해온 상태였는데 어린이들에게 반말을 사용해 왔기 때문이었다. 말을 놓아도 되는지 서로 이야기하고 약속하는 과정이 없었다.


‘어린이에게 반말하지 않는다.’와 ‘별문제 없었는데 이제 와서?’라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혼란스러웠다. 높임말을 쓴다고 생각하니 어린이들과 친밀함이 사라지고 불편해질 것처럼 느껴졌다. ‘나이주의’라는 말이 왜 생겼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말과 행동만 바꾸려다 보니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어린이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나의 입장으로만 짐작했다. 어린이들과 이야기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어린이들을 대하는 것이 어색하다. 높임말을 쓰지만 종종 반말을 섞고, “어린 취급”을 하듯 말투를 꾸민다. 때로는 아예 모르는 척하며 나이가 많은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반말을 한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나에게 반말하는 것은 고깝게 생각하면서도 반대의 입장일 때는 ‘어색하니까.’를 핑계 삼는다.


사람을 사람으로 동등하게 존중하는 일이 왜 누군가들을 향해서는 어색하게 느껴질까? 내가 생각하는 사람의 울타리 안에는 누가 존재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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