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기니 Jul 05. 2020

춤추는 한량

나의 직업, 진로의 양다리


                                                                                              

나는 열심히 살았다.  



한량이라고 제목 지어놓고 열심히 살았다고 하면 나와 싸우자는 건가.


한량이라 하면 놀기 좋아하는 양반이라는 건데, 나는 내가 무용계에서 그런 한량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약간 베짱이, 아웃사이더의 느낌이다. 아, 그렇지만 나는 내 삶을 정말 열심히 살았다.


이게 중요하다.  


2020년이 되고 첫 움직임 작업을 얼마 전 시작했다. 안무가 아닌 퍼포머로서의 참여가 오랜만이다. 다양하게 활동하는 다른 예술가들과 만나는 설렘은 언제 느껴도 새로운 흥분감이 있다. 다행히 아직 이 한량 무용수를 찾아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과 함께.


예술시장에서 딱 활발히 활동하는 예술가들 사이에 있으면  나는 꼭 그 시장 안에서의 내 몸, 공간적 위치가 어디쯤인지를 가늠하는 습관이 있다. 다름에서 오는 메울 수 없는 간극에 불안해지면서 꼭 가늠을 해보는 내가 이해가 안 된다.



생각하지 않아도 될 문제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나의 위치는 우리 몸을 팔딱팔딱 뛰게 하는 심장도 아니고, 몸의 중심을 잘 잡아주는 단전도 아니다. 그러니까 딱 어디 잘 안 보이면서, 아등바등 그럭저럭 뭔가를 하며 잘 살고는 있는, 가끔 관심 가져 가꾸기는 해야 하는데, 그러다 한 번쯤 잠시 있다고 티는 내는 그런 발톱 정도의 위치랄까.


여름이 되면 열심히 가꾸어 한 철 잘 뽐내며 모습을 드러내는 액세서리 딱 그 정도. 그러고 보니 여름이 또 아주 놀기 좋은 계절이구나. 한량 맞네.



무용계에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움직인다.



치열하게 경쟁구도를 갖춘 예술 시장에서 나는 약간 비켜서 있다. 언젠가 친한 후배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언니는 대회 같은 거 안 나가고 언니가 작품 하고 싶을 때, 춤추고 싶을 때 그렇게 즐기면서 춤추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고. 나를 잘 파악하고 말했던 건지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그 말을 들으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사실 달리고 싶었으니까. 그 경쟁구도 안에서 나도 중심에 설 수 있는 예술가로 자리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니까.


다른 무용가들이 작품을 통해 상을 받아 유명세를 치르고, 누구나 말하면 알 수 있는 그런 예술가가 되는 목표를 꿈꾸지 않았다면 정말 거짓말이다. 그런데 애당초 나는 글러먹었다. 내가 그렇게 된다면 정말 온갖 노력에 치열하게 예술가의 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까.



예술가들에게 흔히 붙는 단어 '가난한'



나는 그게 싫었다. 우리 집이 IMF를 만나 서서히 무너져가고, 좀 찢어지게 가난하고 어려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꼭 말하는 단칸방, 그게 우리 집이었으니까. 내가 호화를 누린 건 딱 고등학교 때 까지다.


그러니까 난 버스비가 없어 어딜 가는 게 가끔 어려웠고, 쌀 살 돈이 없어 동전 통을 털어 라면을 샀다. 핸드폰 요금이 몇 달째 밀렸으니 내일이면 끊긴다는 친절한 협박과 학자금 대출 이자 밀렸다며 상냥한 멘트로 사람 속 긁는 전화에 주눅 든 회피형 대학생이었다. 잠시 었지만 이 생활을 1분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처음 대학을 들어갔을 때엔 정말 좋았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곧, 선생님의 공연에 출연하기로 결정됐으니 바로 무용실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다른 학교 남학생들과 미팅하는 중이었는데 그냥 받지 말걸. 내 청춘의 첫 미팅이 그렇게 허무하게 인사만 하고 끝이 났다. 그래도 무용수로서는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신이 난 발걸음을 재촉해 지하철을 탔다.  


그때만 해도 우리 집은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척했다. 가족들이 내게 쉬쉬하는 바람에 그 정도인지 몰랐던 거다. 300km라는 물리적 거리는 그 시절의 내게, 아주 멀고 먼 다른 땅의 세계로 느껴졌다. 아무튼 나는 학교 다니며 공연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학생으로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두 가지의 스케줄을 모두 해낼 수 없어 공연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들었던 말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지금 아르바이트로 돈 몇 푼 버는 것과 열심히 땀 흘리며 무대에 서는 값진 경험을 바꾸겠냐고.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다고. 나는 설득되지 못하고 망설임 없이 알바를 택했다. 이 선택은 생각이 불가능했다. 이해받지 못한 마음이 혼자 상처를 입었다.


그 결정을 하기까지는 더 많은 일이 있었다. 한 번은 내려갔던 집에서 벨 누르는 소리에 티브이를 끄고, 아무도 없는 집 행세를 했다. 쉿. 어? 왜 그러지? 다음번엔 생전 처음 보는 집으로 찾아갔고, 그다음은 앞서 보다 작은 집, 그다음은 더 이상 갈 곳 없는 원룸. 그렇게 점점 집도 작아지고 내 마음도 줄어버렸다. 낯설었다.


이후에 딱 한 번 원래 살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학 시절 나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에서, 한참을 울었다. 다시 올라오는 버스 안, 내 눈물의 버스 터미널.


주변 사람들에게 왜 무용단을 나가우선적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 정말 설명하기 싫었다. 나 이만큼 가난해요. 누가누가 더 가난한가? 그거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결국 말을 한다 해도 하지 않는다 해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내 길을 가야만 했다.



나 1남 1녀 중 장녀.



아마 오빠는 미끄러지는 내리막길을 부모님과 함께 내려오느라 더 힘들었을 거라 짐작한다. 전문직이니 그리 어려워도 졸업만은 시킨 나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오빠. 복합적인 미안함에 외면하지 못했고, 이기적이기 싫었다. 후회 또한 없다. 나는 다시 돌아가도 그 선택을 할 거다.


나와 오빠는 내 자취방 원룸에서, 엄마와 아빠는 마지막 해돋이 빌 원룸에서, 그렇게 각자의 생존 동거가 시작됐다.



나는 코딱지만 한 원룸에서

크기가 없는 꿈을 키웠다.



내 힘으로 다시 공연을 하리라. 막연했다. 무엇이 되리란 것도 없었다. 그저 생계를 해결하고 춤추고 싶은 마음을 당장 해소시키려 일상을 열심히 살았다.


26살, 어딘가에 소속되어 눈치 보며 공연하는 게 싫어, 뻔뻔한 대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강사로 1년, 회사에 있었던 시간을 바탕으로 사업자를 내고 리플릿을 만들었다. 내 손으로 주소를 일일이 적어 보내며 딱 100만 원. 내 사업에 투자된 초기 자본으로 사회에 오너란 명함을 내밀었다.


그렇게 돈을 벌면서 1년 후에 다시 공연을 하게 됐고, 계속 무용계를 기웃거렸다. 그러다 다시 들어간 무용단에서도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없어 혼란스러운 상태로 나오게 됐다. 여러 번 같은 이유로 무용계에서 멀어졌지만, 그래도 계속 춤출 수 있는 구실을 만들었다. 


선택하지 못한 나의 정체성이 더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결정할 때가 왔다는 걸 알았다.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대학원에 원서를 넣었다. 떨어지면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자. 불행인 듯 다행인 듯 어렵게 합격을 했다. 그 당시 나의 위치가 궁금하기도 했었지만, 춤추고자 하는 나의 꿈을 대학원 입학에 베팅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추고 싶어 하는 한 평생

춤을 추며 살고 싶다.

 


대학원 입학과 함께 결심했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둘 다 버릴 수 없다면 나눠 갖자고.


이제 예전만큼 우리 집은 어렵지 않다. 10년 동안 오빠와 나는 치열한 생존 동거에서 살아남았고,  번의 이사 끝에 나의 결혼으로 생존 동거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빠는 그 힘들다는 재기에 성공하셨고, 가난과 멀어진 우리는 보통의 평민으로 잘 살아간다.


그리고 나는 아직 사업자다. 두 가지로 나누어진 환경 탓에 둘 다 중심부에 위치하지는 못하는. 각각 손톱, 발톱의 위치에서 여전히 나뉘어 잘 살아가고 있다.


사업하는 10년 동안 크게 바뀐 것은 없지만 나는 가끔 나에게 딜을 한다. 시간 분배 잘해서 이 두 가지로 잘 살 아내 준다면, 내가 이것들을 빚어서 무기로 쓸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그 무기 챙겨 들고서 일 년에 한두 번 작품을 내고, 무용수로 무대에 서는 지금이 딱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다.


                                                                                                                                                                      

이러니 무용계에서 날 보면 한량으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량의 길을 간다.


누군가 나에게 잘 산 것 같냐고 묻는다면 그건 대답하기 곤란하다. 그렇지만 열심히 살았느냐는 물음에는 대답할 수 있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나의 것들을 쫓아왔지만,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 챙겨 함께 살아간다.

                                                                                                                                                                                                                                                                          

춤추는 게 좋다. 예나 지금이나. 아마 어떤 대상에 대해 이렇게 오래 짝사랑하는 건 처음인 듯하다. 끝나지 않을 짝사랑인 것도 같다. 그리고 언젠가 이 짝사랑이 결실을 맺을 때, 내가 원하는 위치에 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니 조금 늦더라도, 1년 내내 연습실과 무대에서 춤추지 못하더라도, 손톱, 발톱 예쁘게 칠하고 한 철 밖에 뽐내지 못하는 한량으로라도 나는 이 길을 그대로 가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춤의 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