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기호색
검정색을 좋아한다.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로 불리던 시절 수년간 생일기념 메뉴였고, 지금도 가족외식메뉴 상위권을 유지하고있는
짜장면이 검정색이고, 가장 인간미 느껴지는 히어로 배트맨의 근무복 색깔과 그의 영업용 차량 색깔도 검정색이다.
옐로우나 핑크, 아이보리 따위보다 '블랙'이라는 영어단어의 어감도 왠지 무게감이 느껴지지않나?
형형색색 가을 단풍이 부러워 같이 어울릴만도 한데 한철 잠깐 화려했다가 찬바람에 나뒹구는게 싫어
단풍놀이엔 일절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든다.
혹시나 검정색 나뭇잎이 실제로 있다면 그건 아마 그옛날 그리스신화에 있었을지도 모를 '숯의 신'이
숯만드는 과정이 지겨워 어느날 거꾸로 한번 해봤다가 잘못 나온 불량품임이 틀림없다.
생수통만한 머리통 군데군데 알박기를 시도하고있는 흰머리들을 쉽게 색출해서 숙청할수 있는 것도
파뿌리를 싫어하는 검은 머리카락이 아직도 풍성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실없는 이유가 몇개 더 있지만 검정색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주위에 있는 검정색을 찾아서 보며 위안으로 삼을수 있다는 것이다.
잠시후 밟혀 죽을지도 모르면서 줄지어 일터로 향하는 아파트 화단의 개미들,
폐차 판정 받은지 일년은 지난듯한 회사동료의 자가용,
그저 장기 몇판 두기위해 불안하고 숨찬 걸음으로 동네 공원을 향해 가는 아파트 옆동 할아버지의 지팡이..
어렵지않게 찾아볼수 있는 여러 형태의 검정색들을 보며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저 정도로 까맣지는
않을거라는 위안을 받는다.
어쩌면 세상살이에 찌든 나의 시각이 삐뚤어지고 어두워져서 이리 된것일수도 있다.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다 개미 친구들을 발견한 꼬마가 한참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장차 한국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될수도 있고, 주인의 단거리 출퇴근마저 힘겨워하던 구형 아반떼도 용하다는 카센터 사장님의
약손을 거쳐 후한 값을 받고 사하라사막을 폭풍질주하는 레이싱카로 변신할수도 있을것이다.
한자공부가 두려운 손자에게 장기판위에 담긴 인생 철학의 길을 한칸한칸 알려주는 할아버지도 얼마나
멋있겠는가 말이다.
뭘 얘기하려 했는지 머릿속이 다시 까맣게 됐지만 어쨌든 검정색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