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의 하소연
글을 쓸 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써먹으면 옛날 사람인가요? ^^
그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연극배우로 살아오면서 많은 작품, 많은 역할을 해왔습니다.
일 년에 네 작품을 했다 치더라도 백 편이 넘고 일인다역까지 계산하면 맡았던 역할들은
수백여 명이 될 것 같네요.
그중엔 원숭이도 있고 그리스 왕도 있고 등장하자마자 죽어서는 차가운 무대바닥 때문에 죽어서도
덜덜 떨어야 했던 시체도 있었습니다.
경력이 제법 쌓였음에도 안톤 체호프나 셰익스피어는 아직도 어렵습니다.
이번 생에선 끝까지 어렵겠지만..
제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인데도 뭔 말인지 알 수 없는 대사가 많지요.
이렇게 어려운 연기도 있지만 '어려운 연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하기 싫은 연기'입니다.
대사가 많은 연기도 아니고 감정소모가 많거나 몸을 많이 쓰는 연기도 아닙니다.
담배 피우는 연기와 술 취한 연기입니다.
무대에서 담배를 입에 물면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고 술주정을 부리다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엄마는 애연가였습니다.
담배연기를 뿜으며 한숨소리를 감추고 몸속에 니코틴을 모아서 삶의 무게를 속이던 분이었습니다.
요즘도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고 불릴 때 도덕이나 사회교과서를 보면
국. 토. 개. 발.이라는 대형 글자판이 세워진 어느 강둑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흑백사진이
있었습니다.
그 인부들 중 한 명이 엄마였을 겁니다.
막노동하던 엄마를 따라다니던 때가 많았는데 쉬는 시간마다 '국토개발'이 만들어놓은 그늘밑에 앉아
내게 건빵 한 봉지를 뜯어주고는 담배를 맛있게 피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는 애주가였습니다.
아내가 막내아들 데리고 막노동을 다니기 훨씬 이전부터 그 막내아들이 장가가서 손자 둘을
보여드리고 난 뒤에도 술냄새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반에서 꼴찌를 겨우 면하던 막내아들을 "김박사!"라고 동네 들썩이게 불러대고
아침상 들여놓는 아내에게 술이 없다며 베개를 던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원래 담배를 배우지 못해 그 맛을 모르지만 담배 피우는 연기는 하기가 싫습니다.
대본에는 즐거워서 마신 술이라고 되어있는데도 그 표현엔 자꾸 아버지가 비쳐서 술 취한 연기도
정말이지 하기가 싫습니다.
다가올 봄에 하게 될 작품에 술주정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으로 악역이라 연출에게 구박받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싫은 건 싫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