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노을의 허무쯤이나 될까?
어느 일요일 오후, 운동 강박증인지 기말고사를 앞두고도 운동을 해야겠다는 아들을 아내와 함께 학교 체육관에 데려다주고 나오는 길, 교문 옆 감나무에서 까마귀가 크고 단단한 부리로 ‘그깟쯤’ 몇 개 남은 까치밥을 파먹고 있었다. 그랬다. 단연코 ‘그깟쯤’이었다. 까마귀의 행태는 거리낌이 없었다. 칠흑 같은 깃털에선 윤기가 흘렀고, 그냥 보기에도 까치보다 몸집이 두 배는 커 보였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인지라 옆자리에 탄 아내에게 급하게 사진을 좀 찍어 달라 부탁했다. 그런데 아뿔싸, 자동차 창문을 내리는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자동차 엔진 소리에 놀라서인지 한참이나 까치밥을 파먹는데 몰두하고 있던 까마귀는 검어서 더 윤이 나는 날개를 펄럭이며 그만 날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금세 이름 모를 새 몇 마리가 감나무로 날아와 까마귀가 먹던 까치밥을 차지하더니, 한 입 먹고 하늘을 보고, 또 한입 파서 먹고 하늘을 보며, 까치의 일용할 양식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아쉽긴 했으나, 까마귀의 정찬(正餐) 대신, 이름 모를 새의 ‘까치밥’ 소찬(素餐) 먹는 광경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곤 아내와 나는 ‘세이렌’이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치명적인 노래를 부르며 유혹하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이것이 우리의 원래 계획이었다. 가끔 그곳에서 아내와 나는 일요일의 한가한 여백을 채우곤 했다.
갈색 커피의 온기, 계절은 겨울의 초입이었다. 여백을 채우는 데는 뜨겁고 진한 아메리카노가 제격이었고, 아내에게는 여백을 채울 무료 쿠폰 몇 장이 있었다. 그랬다, 단연코 ‘무료’ 쿠폰이었다. 아내와 나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조금 전 아들의 학교에서 핸드폰으로 찍은 ‘새와 까치밥’ 사진을 확인했다. 급하게 핸드폰 줌으로 찍은 사진은 멀어서 흐려 보였는데, 사실은 그 뒤의 흰 구름 배경 때문인 듯도 했고, 새와 나무의 색이 동색(同色)이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돋보기안경을 쓰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또한 커피와는 별 무관한 일이었고, 아내와 나의 여백에도 크게 영향을 끼치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숲 속에서 길을 잃어 잠시 등산로로 기어 나온 민달팽이 같은 것이었다. 흐린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드는데 갑자기 오래된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붕신천고 임의비(鵬信天高 任意飛-붕새는 하늘이 높음을 믿기에 제 뜻대로 날고), 경지해대 무량음(鯨知海大 無量飮-고래는 바다의 넓음을 알기에 마음껏 마신다.)”
‘믿음’과 ‘앎’을 말하는 듯했으나, 이 또한 까마귀와 이름 모를 새와 까치밥과 세이렌과 아내와 나의 커피 한 잔, 그리고 여백(餘白)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고, 민달팽이와는 더욱 무관한 일이었다. 그냥, 서산 하늘을 붉게 물들이다 지는 ‘저녁노을의 허무(虛無)쯤’이나 될까?(2023.11)
<한(恨)|박재삼. 1933~1997>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도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 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러질까 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꺼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의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작가노트
이름 모를 새는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2002년 10월 ‘어청도’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개체 수가 점점 확산되어 텃새로 정착한 ‘검은이마직박구리’인 것 같았다. 아마 그 새가 아닐까? 확신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