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인·의·예·지·신

부른다 가볍게 나가지 않으니 이것을 ‘知’라 한다.

by 김무균

언젠가 병 레이블에 나뭇잎사귀 하나가 창날처럼 뾰족하게 그려진 알코올 도수 16도짜리 ‘알라야 티에라’라는 와인을 한 잔 마시고, 같이 자리 한 선배들이 집에 가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마시라며 사준 ‘알라야’ 한 병을 또 신줏단지처럼 안아 들고, 하늘이 돈짝 만하게 보이지는 않아서 그냥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다가 지하철을 내릴 곳에서 내리지 못한 관계로 중간에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와서는 그대로 엎어져 깊은 숙면을 취했는데, 아침에 속이 좋지 않고 컨디션이 난망하여 힘들었으나, 어디 똑 부러지게 갈 곳이 없는 백수인지라 침대에 다시 누워 다리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처럼 꼬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내리깔고, 지난밤의 기억을 반추하다가 백수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배가 사 준 와인 ‘아딸라야 알라야 티에라’. 스페인 알만자 지역의 ‘가르나차 틴토레라’ 포도를 100% 사용했다.

그리하여 한참을 창작의 고통에 빠진 결과 앞집 닭이 달걀을 낳듯, 뒷집 개가 강아지를 낳듯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는 다섯 가지 ‘백수지도(白手之道)’의 깨달음을 문득 얻었사온데, 그렇다고 그것이 뭐 경천(驚天)하고 동지(動地)할 정도로 대단하거나, 도척(盜跖)이 와서 놀랄 정도로 새로울 만한 것은 아니옵고, 그냥 술이 덜 깨어 비취사취(非醉似醉) 중에 거미가 제 꽁무니로 거미줄을 뽑듯, 가마우지가 제 입으로 먹이를 토해내듯 토해낸 것이오니 괘념 치는 마시옵소서. 하여튼 그 다섯 가지를 말하자면 이렇사옵니다. 첫째, 다른 이의 지갑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가슴 아파하니 이를 인(仁)이라 한다. 둘째, 좋은 것을 즐길 땐 같은 처지의 친구를 불러내 함께 하고자 하니 이를 의(義)라 한다. 셋째, 집에서나 바깥에서나 늘 용모를 단정히 하고 바르게 차려입으니 이를 예(禮)라 한다. 넷째, 아무나 부른다고 가볍게 나가지 않으니 이를 지(知)라 한다. 다섯째, 언젠가 나 또한 제대로 한 턱 쏠 날이 있을 것이라 굳게 믿으니 이를 신(信)이라 한다. 어떻사옵니까? 취기(醉氣) 미성(未醒) 중의 창작이라 하기에는 실로 놀랍지 않사옵니까.(2021.1.9.)


※뱀다리

도척(盜跖)은 중국 춘추시대 때 공자와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다고 하는 도둑의 두목이다. 무리 9천여 명을 거느리고 전국을 휩쓸었으며, 때로는 공자를 위선자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도척의 다섯 가지 도둑의 도’는 명언(名言)으로 장삼이사들에게 더 유명한데, 그가 진짜 이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다섯 가지 도는 이렇다. 방 속에 감추어진 것을 헤아려 짐작하는 것을 성(聖)이라 하고, 먼저 들어가는 것을 용(勇)이라 하며, 훔친 후 뒤에 나오는 것을 의(義)라 하고, 훔쳐도 되는지 여부를 아는 것을 지(知)라 하며, 훔친 것을 고루 나누는 것을 인(仁)이라 한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고 큰 도둑이 된 자는 천하에 아직 없다. 장자(莊子) 거협편(胠篋編), 유가(儒家)를 공격하고 노자의 도를 밝히는 편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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