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22명이 공을 쫓다 결국은 독일이 이기는 게임이다.”
“진晉 차윤(車胤)의 자(字)는 무자武(子)로 남평인(南平人)이다. 유(幼)에 공근불권(恭勤不卷)하고 박람다통(博覽多通)이나 가빈(家貧)하여 불상득유(不常得油)라. -진나라 차윤의 자는 무자로 남평인이다. 어려서부터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책을 많이 읽어 다통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항상 기름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글귀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중학생 아들에게 새로 산 스탠드 이야기를 해주다 이야기가 제 갈 길을 잃고 삼천포로 빠지더니, 급기야 고등학교 한문시간에 배운 형설지공(螢雪之功)까지 소환되어 나온 것이었다. 불완전한 기억에서 글머리 두어 문장을 간신히 불러내어 주머니 속 반딧불이 빛과 눈(雪)에 반사된 달빛에 책을 비춰 공부해 후에 벼슬이 상서랑(尙書郞)과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랐다는 차윤(車胤)과 손강(孫康)의 알아도 그만, 몰라도 세상 사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은 인물고사에까지 이르렀다. 중학생 아들은 내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시큰둥해진 내가 이야기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즈음 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으로 나와 아내를 자지러지게 했다. “자원이 고갈되었어요?”
얼마 전 서재를 새로 정리하면서 아내에게 책상에 맞는 심플한 스탠드를 하나 구입했으면 한다, 고 이야기했다. 이후 아내는 인터넷에서 스탠드를 검색하며 이것저것 추천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에 썩 드는 스탠드가 없기도 했고, 또 스탠드를 사는 일이 시간을 다투어 살 만큼 급한 일도 아니거니와, 나중에는 스탠드가 꼭 필요한 물건인지도 잘 모르겠어서(작은 서재의 조도는 형광등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천천히 알아보자고 했다. 그리고 스탠드에 대한 일에 대해선 잊고 있었다. 며칠 전 하릴없이 서재와 침대를 오가며 빈둥거리는 나에게 아내가 반품숍에 주문한 물건이 들어왔다고 연락이 왔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오케이~”, 별 할 일도 없거니와 아내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것 또한 내가 맡은 중요한 책무 중 하나라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는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대답했다.(사실 내 반응은 뜨뜻미지근했고, 하이에나처럼 이곳저곳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내가 안타까워 아내가 은혜를 베푼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저녁 시간이 되기 전이었다. 자주 쓰는 자주색 모자를 눌러쓰고, KF94 마스크는 콧등 부분을 꼼꼼히 눌러 빈틈을 노리는 비말(飛沫)과 에어졸의 침투를 미리 차단하고, 당연히 아내가 운전대를 잡은 옆 좌석에 팔짱을 끼고 앉아 “어서 가자! 바삐 가자! 지체하다 문 닫는다,” 아내를 재촉하며 반품숍으로 향했다. 가서 보니 아내가 반품숍에 미리 예약해 둔 상품은 고속충전이 가능한 차량용 핸드폰거치대였다. 상품박스는 개봉되지 않은 것이었고, 가격은 인터넷 가격에 비해서도 20% 이상 쌌는데(협상만 잘하면 이 가격보다 더 싸게 살 수도 있다고 아내가 이야기했다. 이 말인즉슨 가격은 기준이야 있겠지만 주인 마음대로라는 이야기다.), 채 1만 원이 되지 않는 차액에, 요즘 딸이 자주 쓰는 표현을 빌자면 ‘개이득’을 얻은 아내의 얼굴에는‘개만족’한 득의가 저절로 드러났다. 그러나 차량용 휴대폰거치대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던 나는 뭐 독특하고 발랄한 물건 하나 없나 이리저리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스탠드였다. 그간 잊고 있었던 스탠드 하나가 내 앞에, 혹은 아내 앞에 오롯이 나타난 것이었다. 올 때만 해도 전혀 생각지 않았으나, 견물생심(見物生心)이 일었다. 스탠드 몸체는 3단으로 구분돼 관절처럼 구부렸다 폈다 각도를 조절할 수 있었고, 베이스인 받침대는 무쇠처럼 무거워 몸통을 버텨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조명 또한 LED전구라 삼천갑자 동방삭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백열등이나 형광등보다는 수명이 훨씬 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넘어선 그 무엇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스탠드의 몸체가 금속이나 플라스틱 재질이 아니라 원목이라는 것이었다. 원목은 그것이 어떤 나무든 간에 나이가 들면 들수록 품격을 더해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재료였다. 게다가 원목의 책상과도 천생연분일 터였다. 그리하여 이제는 이 물건을 사야 할 일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물론 결제는 아내가 할 것이었는데, 가격은 원래 가격의 절반 정도가 견출지에 붙어 있었으나, 친절한 사장님께서 5천 원을 더 깎아준 데다 현금 할인 5%까지 해주어 비단 치마에 꽃까지 그려 넣은 격이었다.
굳이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느라 뉴스를 찾아보고 읽으며, 작금의 검찰개혁이 어떻고(검찰이 개혁되든 안 되든 내 생활이 달라질 건 별로 없다.), 부동산 정책이 어떻고(일 주택자이긴 하지만 이건 좀 관계가 있다. 최근 받아 든 재산세 고지서의 숫자가 작년보다 크게 늘어났다.), 의료계 파업이 어떻고 하며(누구 말이 맞든, 맞지 않든지 간에 요즘 같은 시기엔 절대 아프면 안 된다.), 스스로 찾아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지 않는다면 세상살이 즐거움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것 같다. 이젠 옛날이야기이지만 영국 EPL ‘토트넘 홋스퍼’ 등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고, 지금은 축구해설자 겸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게리 리네커는 “축구는 22명이 공을 쫓다 결국은 독일이 이기는 게임이다. Football is a simple game; 22 men chase a ball for 90 minutes and at the end, the Germans always win.”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결국은 그런 것이고, 모든 것은 힘을 가진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반품이지만 몇 천 원, 혹은 몇 만 원 더 싸게 산 휴대폰거치대와 스탠드에서 행복을 느끼고, 맛있게 먹은 자장면 한 그릇으로 혀와 뇌가 즐겁기도 하고,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에 감동하고, 나도 반드시 감동할 수 있는 말 한마디 해 주리라 다짐하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존중 속에서 스스로 자존감을 찾으면 그것이 바로 세상사 즐거움이고 행복인 것이다. 굳이 스탠드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또 굳이 스탠드를 산 이유이기도 했다. 오늘은 아주 보람찬 하루였다.(2020.9.1.)
※작가노트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후한이 멸망한 221년부터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상서랑은 중앙정부의 고급관리요, 어사대부는 관원을 단속하는 관청의 장관이라는데, 둘 다 얼마나 높은 벼슬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이러한 연유로 후대 사람들이 서창(書窓)을 형창(螢窓)으로 서안(書案)을 설안(雪案)으로 불렀다고 하니 근거 없는 일은 아니지 싶다. 스탠드를 구입한 ‘반품숍’은 내가 사는 곳에서 2~3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주로 창고형 할인매장인 ‘코스트코’에서 반품된 물건들을 원래 가격보다 훨씬 더 싼 가격에 소비자들에게 되팔아 그 수고로움에 대한 대가를 차액으로 보상받는 곳이다. 이 가게는 넓지는 않지만 다양한 상품들을 갖추고 있고, 또 필요한 물건을 미리 이야기하면 준비가 되는대로 연락을 해주어 아는 이들은 자주 찾는 나름대로 핫한 곳이다. 스탠드는 내 책상 위에서 오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스탠드를 자세히 살펴보니 조립이 잘못되어 있는 듯했다. 나사를 풀어 몸체의 위치를 바꾸고 이리저리 맞추어 보았으나, 도무지 설명서의 그림대로 되지 않았다. 반품숍에 문의했더니 자신들은 제품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래서 제조사에 문의를 했더니 원래 그런 것이라 한다. 찜찜한 마음에 다시 반품숍에 전화를 해 교환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반품숍에서는 교환해 줄 대체품이 없다며, 가져오면 현금으로 반환해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반품숍에서 반품받은 이 반품은 또 어디로 갈까 궁금하다. 다음날 오후 아내 혼자 반품숍으로 가 스탠드를 반품하고, 현금을 돌려받았다. 이것이 스탠드 구매에 대한 장황한 사설에도 불구하고, 서재 책상 위에서 스탠드가 사라진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