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 두 번째 주사위를 던지다.
공화파의 병사들을 먹일 엄청난 양의 양식과 라비에누스의 기병대가 겨우내 먹일 말먹이가 보관된 아테구아(코르도바 인근에 있는 작은 도시)는 카이사르의 은밀한 공격에 허를 찔렸다. 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코르두바(현 지명은 코르도바,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주의 주도이다.)에서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지만 이때는 이미 카이사르가 아테구아를 알레시아 공성전(B.C 52년 9월 로마와 갈리아부족연합 사이에 벌어진 전투. 5만 명의 로마군이 8만 명의 베르킹게토릭스의 농성군과 26만여 명의 갈리아 포위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카이사르는 7년간의 갈리아 원정을 종결하고 갈리아 전역을 복속하게 된다. 알레시아는 현재 프랑스 중부 디종과 오를레앙을 잇는 선상에 있는 구릉지대다.) 때처럼 방벽으로 두른 후였다. 아테구아는 용맹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함락되었다. 이제 라비에누스의 풍부했던 말먹이는 카이사르가 총애해 마지않는 갈리아 기병대의 훌륭한 말먹이가 될 터였다. 공화파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라비에누스는 말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군대를 연안 근처로 이동시켜야 했고, 히스파니아 주민들은 공화파에 대한 신뢰를 접기 시작했다. 히스파니아 탈영병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기원전 45년 1월 초, 달력상 날짜와 계절이 정확히 일치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기원전 45년 3월의 초순, 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한 노예로부터 히스파니아인 군관과 병사들이 자꾸 탈영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일단 그는 탈영을 시도했던 자들을 하룻밤 동안 잡아두었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그들을 그냥 풀어주었다. “싸울 의지가 없다면 굳이 잡아두어 무엇을 하겠는가?” 그의 자신감은 추락하고 있었다. “우리의 대의에 헌신하는 자들이 너무 적어.” 나이우스가 동생 섹스투스에게 말했다. “지구상에 카이사르를 물리칠 천재는 없어. 그리고 난 지쳤어.” 나이우스는 손을 뻗어 섹스투스에게 작은 종잇조각을 내밀었다. 카이사르가 새벽에 보내온 편지였다.
“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보좌관 일동, 그리고 공화파 군대병사들에게. 더 이상 카이사르의 관용은 없다. 이 편지는 여러분에게 그 사실을 통보하기 위한 것이다. 사면은 더 이상 없으며, 내게 한 번도 사면을 받은 적이 없는 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히스파니아 병사들 역시 같은 죄를 지었으니 잘못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다. 공화파의 대의에 동조한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도시에서 싸울 수 있는 연령의 남자들은 모두 발견 즉시 처형될 것이다.”
“카이사르가 엄청 화가 났나 봐! 아, 가이우스 형, 장난 삼아 벌집을 걷어찬 것 같은 기분이야! 카이사르가 어째서 이렇게 화가 났지? 응?” 섹스투스가 나이우스에게 낮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카이사르는 정말 무척 화가 나 있었다.(기원전 51년, 지속되는 갈리아의 저항에 마침내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카이사르는 함락한 장발의 갈리아 욱셀로두눔에서 갈리아인 4천 명의 손목을 자르고 그들이 갈리아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돌며 구걸하게 한 전력이 있었다.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면 더 이상 카이사르에게 자비는 없었다.) 카이사르의 화는 어쩌면 세르빌리아에게서 받은 한 통의 편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은 편지 속의 키케로 때문이었고 그가 집필한 ‘카토’ 때문이었다. 키케로에 따르면 카토는 로마 역사상 가장 고귀한 로마인이자 이젠 껍데기만 남은 공화국의 가장 충직하고 지조 있는 충복이었고, 카이사르를 비롯한 이 세상 모든 폭군의 적이요 ‘모스 마이오룸’의 흔들림 없는 수호자였으며,.... 육신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았고 마지막까지 진정한 스토아주의자였다. 키케로는 선을 넘었다. 넘어도 한참을 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화는 이 때문이었다. 책은 모든 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의 지고한 미덕과 독재관 카이사르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악덕을 선명하게 대조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다. 분노가 식지 않았으나 카이사르는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키케로의 ‘카토’에 대한 반박문을 쓰기 시작했다. 키케로의 주장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논리를 완전히 뒤엎을 참이었다. 키케로가 이 산문을 읽으면 자신의 부족한 재능이 부끄러워지리라. ‘카토’는 그냥 무시해서는 안 될 작품이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카이사르를 그 어떤 그리스 폭군보다 더한 악한으로 여기게 될 터였다.
나이우스는 전조를 느꼈다. “내가 전쟁터에서 쓰러지거나 뭔가 다른 난관에 처하면 네가 스크리보니아(스크리보니아는 섹스투스의 형인 나이우스의 아내였다.)와 결혼해 줘.” 섹스투스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형의 간절한 눈빛을 보곤 애정과 슬픔이 밀려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전조는 계속되었고 공화파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투를 상의하러 간 자리에서 라비에누스는 이제 앞으로 전투지휘를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내게는 카이사르의 운이 없네.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 확실히 깨달았어. 내가 전략을 짤 때마다 우린 늘 패배했지. 그러니 이젠 자네 차례일세, 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나는 기병대를 맡아서 무조건 자네의 명령을 따르겠네.”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장남은 머리가 희끗희끗 세어가는 라비에누스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닳고 닳은 전장의 독수리까지 저런 말을 하는데 이젠 정말 어떻게 될까? 라비에누스는 이 모든 게 카이사르의 운(運)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나이우스가 보기에 이것은 운이 아닌 능력의 문제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보낸 최후통첩문은 공화파의 병사들에게 오히려 결사항전의 의지를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전투에서 져도 죽고, 항복해도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라비에누스는 이러한 병사들의 공포심을 역으로 이용했다.(전쟁의 천재인, -특히 심리전에서도- 카이사르가 왜 이런 편지를 나이우스에게 보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만큼 카이사르의 분노가 컸던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공화파 병사들에게 그의 공포를 확인시킴으로써 전투의지를 꺾으려 했던 것인지. 여하튼, 전투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한 푼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로마인이 로마인을 학살했다고 카이사르의 무자비를 비판했다. 그의 죽음은 어쩌면 여기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싸우기 직전에 병사들에게 이 편지를 읽어주게.” 어깨를 쭉 펴며 라비에누스가 나이우스에게 말했다. “내일 전투를 개시하기 좋은 터를 찾아보세. 결사 항전하는 거야. 이번 싸움을 카이사르가 치러본 가장 힘든 전투로 만들어주겠어.” 문다에서의 전투가 벌어지기 바로 하루 전날이었다.
다음 날인 기원전 45년 3월 17일, 문다(스페인 남부 코르두바 동쪽에 있는 들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병력은 8개 군단 4만 8천여 명의 보병과 기병 8천여 명이었고, 나이우스 측은 15개 군단 9만여 명의 보병과 기병 6천여 명이었다.)은 동이 트고 곧바로 교전을 시작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냉혹하고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혈투였다. 문다에서는 영리하고 획기적인 전술 따위가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카이사르가 지금까지 겪어본 가장 직접적인 전투였으며, 거의 질 뻔한 전투이기도 했다. 공화파는 카이사르로부터 전투에서 자비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전투가 끝난 뒤에도 관용은 없으리라는 공식 통보를 받은 터였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항전했다. 여덟 시간이 넘게 지났지만 전투는 계속됐다. 발부리(굽이 갈라지지 않은 카이사르의 말)에 올라타 전투를 지켜보던 카이사르는 최전방이 흔들리며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을 보았다. 그는 곧바로 발부리에서 내려 방패와 검(劍)을 들고 사병들 사이를 헤치며 최전방으로 다가갔다. 10군단의 전열이 흐트러져 있었다. “틈만 나면 항명을 일삼는 이 개새끼들아, 적들은 고작 어린애들이다.” 카이사르는 주변의 병사들을 마구 때리며 악을 썼다. “너희들이 계속 이렇게밖에 못하면 너희나 나나 오늘이 인생 끝장나는 날이다! 나도 너희와 함께 죽을 테니까!” 10군단은 그에게 화답했다. 대열의 간격을 좁히고 자기들 한가운데 서 있는 카이사르와 함께 계속 싸웠다. 하지만 해가 질 무렵에도 전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퀸투스 페디우스의 기병대가 나설 차례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둔덕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병대는 나이우스의 우측을 공격했다. 젊은 군관 살비디에누스 루푸스가 그들을 이끌었다. 게르만족 천 명이 증원된 갈리아인 기병들이 라비에누스의 기병대에 달려들고 측면을 에워싼 뒤 나이우스 폼페이우스 군대의 후방을 쳤다.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공화파 군대와 히스파니아 동맹군의 시신 3만 구가 문다의 들판을 가득 채웠다. 카이사르의 10군단도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다. 지난 항명을 속죄한 것이었다.(기록에 따르면 실제 카이사르의 손실은 병사 1천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훗날 카이사르는 이에 대해 “이전까지는 승리를 위해 전투를 벌였지만, 문다에서는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고 회고했다.) 오랫동안 갈리아에서 카이사르와 함께 싸웠으나 먼 히스파니아에서는 적으로 마주쳤던 늙은 독수리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도 전사했다. 내전의 중심에 있던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아들들, 폼페이우스 형제는 달아났다.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장남 나이우스는 히스팔리스(스페인 남부 도시. 현 세비야)로 피해 은신처를 찾던 중 그를 뒤쫓아 온 카이센니우스 렌토의 손에 죽었다. 카이사르의 하급보좌관인 카이센니우스 렌토는 나이우스의 목을 베어 시장 한복판에 전시했다. 남은 공화파를 소탕하던 가이우스 디디우스가 나이우스의 머리를 발견하고 카이사르에게 보냈다. 디디우스는 카이사르가 이러한 야만적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카이센니우스 렌토는 이 사건으로 인해 곧장 카이사르의 눈 밖에 날 터였다. 섹스투스는 말을 타고 코르두바로 달아났다. 히스파니아인들이 공화파를 택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사람들 눈을 피해 다녀야 했다. 코르두바 성문 밖에서 우연히 아버지의 해방노예 필리포스를 만난 섹스투스는 그의 도움으로 이전엔 형 나이우스의 연인이었으나 곧 자신의 아내가 될 스크리보니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점령군을 피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달려 아버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오래된 영지인 가까운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코르두바에서 수백 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이베루스 강(현 에브로 강. 스페인 북쪽 프랑스와의 국경 근처에 있다.)을 건너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다음 행선지는 아버지가 수년간 말을 맡겨두었던 라케타니족에게로 가는 것이었다. 섹스투스와 스크리보니아는 당분간 거기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떠나고 나면 그는 발레아레스제도(지중해 서부, 스페인 동쪽 바다에 있는 섬들)에서 가장 큰 섬 마요르로 가서 나이우스의 함대들을 찾아 제독이 되고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할 터였다.
문다에서의 전투가 끝난 후 카이사르의 군대는 바람같이 공화파의 근거지인 코르두바로 향했다. 코루두바는 성문을 닫아걸고 저항했다. 하지만 이내 내부로부터 동요가 일어났고, 스스로 문을 열어젖히며 유명한 카이사르의 자비로운 관용이 자신들에게도 해당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관용은 없었다. 카이사르는 입영 가능 연령대의 남자를 전부 불러 모아 즉결 처형했다.(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자가 2만 2천여 명에 달했다.) 코르두바 시에도 우티카(아프리카 카르타고 제2의 도시. 카토에게 협조했고, 카이사르와의 전투에서 패한 카토는 이곳에서 자결했다.) 못지않게 무거운 벌금을 물리는 것은 카이사르에게 당연한 조치였다.
기원전 49년부터 기원전 45년까지 장장 5년여를 끌어오던 카이사르와 공화파의 내전은 문다전투로 사실상 끝이 났다. 이제 로마로 돌아가면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이 될 터였다. 그리고 동방의 파르티아 원정에 나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겼다고 이긴 게 아니다. 오늘 문다와 코르두바에서 죽인 병사들은 대부분 동포 로마인들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아버지이거나, 형제이거나, 남편이다. 이제 나는 로마에 돌아가더라도 고개를 들 수 없게 됐다.”(그의 생각처럼 그가 로마로 돌아갔을 때 로마의 반응은 싸늘했다.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는 당시 로마의 반응을 이렇게 전했다. “로마 시민들은 어느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들은 카이사르가 죽인 것은 외국의 장군이나 왕이 아니라 로마의 명문 귀족이나 평범한 집안의 아들과 가족들이었다.”)
카이사르의 불행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로마로 돌아오는 내내 그가 모르는 사이에 싹트고 있었다. 코르두바에서부터 카이사르와 동행하고 있던 어렸지만 현명한 옥타비우스도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싹들은 카이사르로부터의 신뢰가 아예 없어졌거나 없어지리라 예측하는 자들, 아직 취해지지 않았으나 앞으로 카이사르에 의해 취해질지도 모를 인사를 속단하며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데키무스 브루투스,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가 그 싹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모임을 농담 삼아 ‘카이사르 살해 모임’이라 불렀다. 데키무스 투룰리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및 카이킬리우스 부키올라누스 형제, 푸불리우스 및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 형제, 나이우스 폼페이우스를 참수한, 그리고 지금 화가 잔뜩 나 있는 카이센니우스 렌토 또한 모임의 고려대상 인물들이었다. 지금은 카이사르로부터 총애받고 있지만 그 사실이 언제 바뀔지 몰라 불안해하는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키우스는 바실루스가 추천했지만 트레보니우스와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그를 대상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몇 년 전 카이사르를 살해하려 하다 목적을 이루지 못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곧 그 의중을 떠볼 대상이었다. 당연히 그는 수락하리라.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 안토니우스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로마로 돌아오는 도중 카이사르는 자신의 수습군관의 소개로 만난 수습군관과 같은 열일곱 살의 마르쿠스 아그리파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두려움을 모르고 강건한 체력에 굉장히 똑똑한 젊은이, 충직한 일꾼,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안타까웠다. 옥타비우스는 아그리파를 경애하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넌 마르쿠스 아그리파를 무척 좋아하지.” 카이사르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만난 그 누구보다 좋습니다.” 옥타비우스가 단박에 대답했다. 종기의 고름을 짜내는 칼질은 깊고 가차 없어야 했다. “넌 아주 예쁘장하게 생겼어, 옥타비우스.” 옥타비우스는 깜짝 놀랐고, 이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빨리 나이가 들어서 이런 외모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카이사르.”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가 들어도 전혀 바뀌지 않을 거다. 너는 앞으로도 죽 지금 같은 외모를 유지할 거야. 아주 예쁘장하고 다소 가냘픈.” 카이사르는 옥타비우스의 아름다운 외모가 걱정이었다. “연정을 품은 게 아니라면 그렇게 넋 놓고 바라보는 행동은 그만둬라. 그리고 결코 그런 마음이 싹트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단속해라.” 카이사르는 오래전 비티니아 니코메데스 왕과 자신에 얽힌 비방과 중상모략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이 문제를 잘 아는 사람의 충고니까 잘 새겨들어야 해.”라고 말하면서.
카이사르는 잡았던 옥타비우스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니까 마르쿠스 아그리파를 그렇게 대놓고 경애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은 그만두렴. 네가 그러는 이유를 나는 알지만 남들은 그렇게 관찰력이 뛰어나지 않으니까. 아그리파와 우정을 키워가거라. 하지만 늘 약간의 거리를 둬야 해. 그와 우정을 키워가라는 이유는 아그리파가 너와 동갑이고 언젠가 그 같은 추종자들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야. 그는 장래성이 아주 밝아 보여. 네가 아그리파의 경력에 도움을 준다면 그는 네게 온전히 충성할 거야. 아그리파는 그런 종류의 사내니까. 내가 그와 거리를 약간 두라는 이유는, 그가 너와 동등한 지위의 친구라는 인식을 결코 그에게 심어주면 안 되기 때문이야. 그를 아이네아스(그리스에서 건너간 로마의 시조.)의 충직한 친구 아카테스(아이아네스가 가장 믿고 신뢰했던 동료이자 친구. 사람들은 ‘믿음직한, 충직한, 마음 놓을 수 있는’이라는 뜻의 라틴어 피두스(Fidus)를 이름 앞에 붙여 그를 ‘피두스 아카테스(fidus Achates)’라 불렀다.)로 만들어라. 너는 베누스와 마르스의 피를 타고난 반면, 아그리파는 오스카의 메사피족인 데다 혈통 없는 가문 출신이 아니냐. 남자라면 누구나 위대한 인물이 되어 위대한 과업을 성취하는 꿈을 꿀 수 있어야 해. 그리고 나는 그런 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실현시킬 수 있는 로마를 만들 거야. 하지만 나나 너 같은 사람들은 고귀한 태생을 덤으로 선물 받았고, 그만큼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 우리는 새로운 가문을 개척하기보다 우리 조상들의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단다.” 이것이 정치와 우정, 그리고 혈통과 고귀한 신분에 대한 카이사르의 생각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미 옥타비우스를 후계자 명단에 올려놓고 있었다. 현명했지만 아직은 어린 옥티비우스는 이런 카이사르의 속내를 몰랐으나 결국은 알게 될 터였다. “이렇게 늦게야 카이사르와 친해지다니 너무해. 내가 어릴 때부터 이처럼 이 분과 가깝게 지냈다면 천식을 아예 앓지 않았을지도 몰라. 카이사르에 대한 나의 사랑은 무한해. 나는 이 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거야.”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친절함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존경으로 화답했다.
(브루투스냐? 옥타비우스냐? 2편에서 계속....)
※작가노트
위 글은 콜린 매컬로의 「Masrers of Rome Ⅵ. ‘시월의 말, The October Horse’ 2권. 7장 균열의 시작(93p~210p). 기원전 46년 인테르칼라리스(윤달)부터 기원전 45년 9월까지.」를 읽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사건 및 지명에 주(註)를 넣고, 약간의 내 생각을 첨가해 요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