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보니우스의 머리를 잘라 카이사르 조각상의 대좌에 못으로 박았다.
기원전 43년 율리우스 달-카이사르는 자신이 태어난 7월을 다섯 번째 달을 의미하는 퀸틸리스(Quintilis)에서 자신의 이름인 율리우스(Julius, 영어의 July)로 바꾸었다. 그리고 3년 전인 기원전 46년에는 이집트의 역법을 참고하여 홀수 달은 31일, 2월을 제외한 짝수 달은 30일, 그리고 2월은 29일로 하는 달력을 정비했다. 이것이 바로 율리우스력이다.-의 마지막 날 카이사르의 상속자 옥타비아누스는 8개 군단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들어간 뒤 자신이 직접 엄선한 2개 군단을 이끌고 빠르게 로마로 진군했다. 공황상태에 빠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진군을 멈추라고 사정했다. 로마에 직접 나타날 필요 없이 부재중 후보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게 해 줄 테니 더는 진군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노련병으로 구성된 아프리카 속주의 2개 군단이 오스티아(로마 남서쪽 2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고대 도시)에 도착하자 이를 낚아채 야니쿨룸 언덕의 요새를 방어하도록 했다. 하지만 기원전 43년 8월의 열일곱째 날 카이사르의 상속자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로마에 입성했다. 야니쿨룸 언덕(로마에서 티베리스 강 건너편 서북쪽에 위치한 언덕)의 요새를 지키던 병사들은 칼과 필룸창(고대 로마 병사가 사용한 던지기 창의 일종)을 거두고 환호와 화환의 물결 속에 침략자 쪽으로 넘어갔다. 다음날 원로원은 항복을 선언했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곧바로 치러질 집정관 선거의 후보로 출마해 줄 것을 공손히 청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제안을 품위 있게 받아들였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가 수석집정관에 카이사르의 조카 퀸투스 페디우스가 차석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옥타비아누스 나이 열아홉 살, 스무 살이 되려면 아직 한 달이 더 지나야 했다. 마리우스와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시기라면 어림도 없는, 젖비린내 나는 일이었다.
9월 스물 셋째 날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은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서방 총독들과 맞서기 위해 11개 군단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10월 초 포룸 율리(지중해에 면해 있는 로마 최대의 군항. BC 49년 카이사르가 세웠다. 현재 지명은 프랑스의 프레쥐스다.)에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17개 군단을 이끌고 출정했다.(당시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에 의해 로마의 반역자가 되어 있었다.) 나머지 6개 군단은 루키우스 바리우스 코틸라의 지휘하에 서방을 지키도록 포룸 율리에 남겨두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나타났을 때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는 전투에 능한 장군이 아니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말하느냐에 따라 성공확률이 꽤 높은 다른 전략을 구상했다. 안토니우스가 보노니아(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주의 주도, 현 지명은 볼로냐) 외곽에 위치한 옥타비아누스의 진지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무티나에 도착하자, 호민관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가 찾아왔다. “카이사르 집정관님은” 스물한 살의 코르니피키우스가 말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마르쿠스 레피두스와 의논을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의논인가, 아니면 항복인가?” 안토니우스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분명 의논입니다. 저는 화해 의사를 가지고 왔고 다른 뜻은 없습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그 제안을 고려해 보겠다고 전하게” 안토니우스는 말했다. 며칠 후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보노니아 인근에 위치한 물살이 빠르고 강한 라비누스 강(이탈리아 북부를 가로지르는 강으로 현재의 이름은 포강이다.) 한가운데 있는 섬에 모였다. 섬에서는 로마에 대해서, 암살자들에 대해서, 속주에 대해서, 공권박탈에 대해서, 군자금과 곡물에 대해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의 전쟁이 끝난 뒤에 대해서 ‘의논’이 진행됐다. 어떤 사안은 레피두스가 불만이었고, 어떤 부분은 안토니우스가 불만을 표시했지만 결국은 세 명 모두가 동등하게 군대와 로마의 지휘권을 가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로마로 돌아가는 순서는 첫째 날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가 안 된다고 했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우겼다.), 둘째 날 안토니우스, 셋째 날 레피두스 순으로 정해졌다. 세 사람은 섬의 한가운데로 걸어가 서로 악수했다. 삼두연합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이것이 옥타비아누스가 구상한 싸우지 않고 이기는 성공확률이 꽤 높은 다른 전략이었다. 동방의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그리고 또 다른 카이사르 암살자들은 이제 곧 이해가 맞아떨어진 삼두연합군을 만나게 될 터였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삼두연합이 현실화되고 나서 가장 먼저 차석집정관이었던 퀸투스 페디우스가 자살을 했다. 페디우스가 삼두연합의 공권박탈을 찬성할 수 없다고 격하게 반발하자, 옥타비아누스는 공권박탈자 명단의 제일 첫머리에 당신 이름이 들어갈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날 밤, 페디우스는 가족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뒤 할복자살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페디우스의 아내 발레리아 메살라에게 “퀸투스 페디우스가 집정관으로서 격무에 시달렸으며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페디우스는 카이사르 암살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다. 기원전 42년 10월 스물 셋째 날은 ‘카이사르 살해 모임’의 설계자 카시우스의 마흔두 번째 생일이었다. 원칙적이라면 올해 그는 집정관에 당선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온 것은 안토니우스와의 전투였고, 그곳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피(그리스 북동부 해안에 있는 고대 도시) 염습지(鹽濕地)였다.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의 진지를 급습했다. 카시우스의 진지는 브루투스의 진지와 떨어져 있었다. 전투 중 안토니우스군에게 자신의 군대가 괴멸한 것이라고 생각한 카시우스는 일단 언덕으로 도망쳐 더 자세한 전투 상황을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염습지를 가득 채운 먼지구름으로 상황을 자세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언덕 아래서 일단의 기병들이 갈색 안개를 뚫고 나타나자 카시우스는 자신을 잡으러 온 안토니우스군이라고 생각했다. 티티니우스가 기병들의 정체를 알아보러 간 사이 카시우스는 해방노예 핀다로스에게 자신이 카이사르의 얼굴에 찔러 넣고 잔인하게 손잡이까지 돌렸던 단검을 주곤 “정확히 찌르게”라며 흉갑을 풀고 가슴 왼편을 걷어 올렸다. 핀다로스는 정확히 찔렀다. 카시우스는 앞으로 넘어져 도로 위에 쓰러졌다. 하지만 갈색 안개를 뚫고 나타난 갈리아 기병들은 실상 해방자군 소속이었다. 그들은 브루투스의 병사들이 삼두연합군 진지를 급습해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을 카시우스에게 전하려고 나타난 것이었다. “왜 기다리지 않은 겁니까?” 소식을 알아보러 갔던 티티니우스는 절규했다. 그리고는 카시우스의 싸늘한 주검 옆에서 자기 칼을 꺼내 자결했다. 둘의 시신은 브루투스에게 전해졌다. 카시우스의 시신은 화장되어 아내 테르툴라에게 전해질 터였다.
11월 초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삼두연합군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 식량이 문제였다. 카시우스는 사라졌지만 브루투스는 건재했다. 어느 곳에서도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브루투스는 한사코 교전을 거부하고 있었다. 해방자군이 바다를 장악하고 있으니 안토니우스나 옥타비아누스 모두 어느 곳에서도 식량을 가져오지 못하리라는 것이 브루투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암살자들의 일원인 킴베르와 리가리우스는 전투를 거부하는 브루투스에게 격분했다. “병사들은 교전을 원한단 말이오. 그들은 적군이 굶어죽는 동안 편안히 배를 채우기를 원하지 않소!”라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의 교전이라고 브루투스를 몰아세웠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안토니우스의 병사들은 매일 브루투스의 진지 앞에서 배고픈 똥개처럼 울어대고, 발정 난 똥개처럼 울부짖고, 발길질당한 똥개처럼 칭얼거렸다. 이러한 모욕 속에서 병사들의 원망은 교전을 허락하지 않는 브루투스에게 집중되었다. 이두스 다음날 마침내 틸리우스 킴베르가 예고도 없이 방으로 쳐들어 왔다. “브루투스, 당신이 원하든 말든 간에 당신은 전투를 개시해야 할 거요!”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닌 킴베르가 호통쳤다. “안돼, 그러면 모든 게 끝장날 거요! 저들이 굶어 죽게 내버려 두란 말이오.” 브루투스는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말했다. “내일 전투 명령을 내리시오, 브루투스. 안 그러면 내가 당신 지휘권을 빼앗아 버리겠소.” 모든 해방자, 보좌관, 군관, 백인대장, 병사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 며 킴베르가 협박했다. “그럼 그러시오. 전투 명령을 내리시오. 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우리가 패배했을 때, 나는 그러길 원하지 않았다는 걸 반드시 기억해 주시오.” 결코 원하지 않았으나 브루투스는 어쩔 수 없이 전투를 허락했다. 다음날 3시에 전투가 시작됐다. 밀리고 밀리는 전투는 초반에는 어느 편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필리피 회전은 결국 해방자군 절반이 목숨을 잃었거나, 지중해 세계의 그 누구에게도 그들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언덕으로 도망친 브루투스는 자신의 칼집에서 칼을 꺼내어 에페이로스의 스트라톤에게 주었다. 스트라톤은 독수리 모양의 손잡이만 남기고 칼날 전체를 브루투스의 왼쪽 흉곽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모두가 거부하고 오로지 그만이 그의 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브루투스는 풀이 무성한 바닥에 무릎이 닿기도 전에 죽었다. 브루투스의 시신은 안토니우스에게 전해졌다.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의 장례식을 로마 귀족의 예우에 맞게 치러지길 원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암살자의 머리를 원했다. 결국은 안토니우스가 졌다. 브루투스의 머리는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참모인 아그리파에 의해 순식간에 잘려졌다. 머리가 없는 브루투스의 몸은 머리를 대신한 호박과 함께 화장되었다. 머리는 로마로 옮겨져 창에 꽂혀 포룸 로마눔의 디부스 율리우스 조각상 기단에 세워질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것을 원했다. 하지만 브루투스의 머리는 운반 도중 디카리온과 앙코나 사이의 아드리아해 바닥에 영원히 놓이게 되었다. 폭풍우가 몰아치자 화물의 실체를 알게 된 선원들이 사악한 화물로부터 자신들의 안전을 구하기 위해 선장이 보관하고 있던 브루투스의 머리가 든 항아리를 빼앗아 배 밖으로 던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카이사르 암살자들의 최후는 이미 1년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카이사르 살해 모임’의 중심에 있었던 트레보니우스는 시리아로 가던 돌라벨라에게 그가 기거하던 스미르나(현재의 터키 이즈미르로 아나톨리아의 에게 해변의 전략적인 요충지)에서 생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돌라벨라는 트레보니우스의 머리를 잘라 광장에 세워진 카이사르 조각상의 대좌에 못으로 박았다. 그리하여 트레보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자 중 제일 먼저 목숨을 잃었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의 삼두연합 체제가 형성되기 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싸울 때 또 다른 암살자 루키우스 폰티우스 아퀼라도 안토니우스 편에 서서 싸우다 전사했다. 카이사르 유언장의 제2 상속자인 것을 몰랐던 암살자 모임의 설계자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공포와 우울감 속에서(이 시기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예전의 위풍당당함이나 카이사르와 함께 갈리아에서 싸울 때 보여주었던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지 못했고, 참모들의 조언도 듣지 않았으며, 자신의 병사들의 경험을 믿지 못했고, 안토니우스와 충돌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군단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려 14개 군단이나 되는데도 말이다.) 암살자 동지였던 마케도니아의 마르쿠스 브루투스에게로 가다가 이탈리아 갈리아에서 브렌니족에게 생포되었다. 브렌니족의 족장 카밀루스는 안토니우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이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억류하고 있는데 이 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가 편지의 내용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죽이시오’라는 짧은 답장과 함께 금화가 가득 담긴 자루를 보내왔다. 브렌니족은 데키무스의 잘린 머리를 그들이 돈값을 했다는 증거로 안토니우스에게 보냈다. 암살자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던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 또한 단체로 들고일어난 노예들에게 고문당하고 살해됐다. 그는 노예 고문을 통해 변태적인 쾌락을 탐하던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삼두연합 소식을 듣고 로마를 떠난 키케로는 카이에타(이탈리아 중부 라치오주에 있다.)에서 그를 쫓던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에게 잡혀 양날 검에 머리가 잘렸다.(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죽음을 환호했지만 직접적으로 카이사르 살해에 가담한 적은 없었다.) 카이사르 살해 후 틈만 나면 안토니우스를 물고 뜯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잘린 머리와 안토니우스에 대해 끔찍한 글을 썼던 양손도 함께 잘려 안토니우스에게 보내졌다. “이제야 잡혔군, 내게 앙심을 품은 늙은 잡놈 같으니라고!” 상자에 든 머리를 꺼내 들며 안토니우스가 소리쳤다. 키케로의 나이 예순아홉 살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에 의해 길게 빼어져 철필에 꽂힌 혀가 나와 있는 키케로의 머리와 양손은 나무판에 고정된 채 로스트라 연단에 내걸렸고,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로마인들은 이 모습을 보고 경악해야만 했다. 이것이 로마에서, 지중해에서 카이사르를 제외하고 말과 글로는 누구도 당할 수 없었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죽음이었다. 기원전 42년 5월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엄마인 세르빌리아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아내 포르키아가 벌겋게 달아오른 석탄을 삼켜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브루투스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머리에는 엄마가 그의 아내를 의자에 묶어 억지로 입을 벌리고 목구멍으로 석탄을 밀어 넣는 장면이 떠올랐다. 포르키아가 아니라면 ‘카이사르 암살 모임’에 그가 참가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포르키아 또한 넓은 의미에서 카이사르 암살자였다. 기원전 42년 10월에는 안토니우스군과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연합군과 벌어진 필리피 전투에서 카이사르 암살자들 중 젊은 루쿨루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큉틸리우스 바루스가 싸움 중에 전사했다. 킴베르, 바실루스, 리가리우스, 라베오, 카스카 형제, 그리고 다른 암살자들 몇 명도 전투에서 혹은 전투가 끝나고 죽었다. 모두 카이사르가 살해당하고 1년이 지난 기원전 43년 1월부터 42년 12월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이로써 카이사르 암살자들 중 살아남은 자들은 없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안토니우스 밖에 없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암살자 안토니우스가 죽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때까지 그는 안토니우스의 독선과 오만과 딱딱거림을 받아 줄 생각이었다.
※작가노트
내 생각에 2000년 전 로마인들은 곤경에 처하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여긴 것 같다. 많은 원로원의 의원들이, 장군들이 그들이 생각하기에 모욕을 당했거나, 미래가 불투명하거나, 죽임을 당할 것을 미리 알거나, 현 상황을 헤쳐나갈 길이 보이지 않거나 할 때 자살을 선택했다. 일본 사무라이의 셋부쿠(切腹, 할복자살)가 여기서 비롯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으나 별 연관은 없는 것 같았다. 로마인들의 자살에는 사무라이의 비장함이나 전체감이 느껴지지 않아서이다. 그들의 자살은 가끔은 뜬금없다. 누가 자살을 강요하지도, 자살을 할 만큼 상황이 그렇게 불명예스럽지도, 로마인들이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 어떤 부분은 매우 관용적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꼭 그 방법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살을 선택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수석집정관이었을 때 차석집정관이었던 퀸투스 페디우스, 그리고 ‘카이사르 암살 모임’의 중요한 회원이었던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자들이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6부 ‘시월의 말’ 세 권을 2018년 1월 12일 사서 3월 2일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9월 26일에야 읽기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시월의 말’ 세 권의 합친 페이지 수는 모두 1,364페이지다). 독서를 마치기까지 무려 7개월이나 걸린 것이다. 물론, 중간중간 다른 책도 읽고, 틈틈이 독후기(매컬로는 ‘마스터스 오브 로마’ 6부를 마치면서 “작가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고 현대를 사는 사고방식, 윤리, 도덕, 이상을 옛 시대와 등장인물에게 투영하고픈 유혹을 이길 수만 있다면, 소설은 다른 시대를 탐구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를 읽고 몇 편의 독후기를 쓰면서 나는 매컬로의 이 말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자주 이 말을 어겼다. 돌이켜 보니 깜냥도 되지 않는 어설픈 참견이었고, 지적허영이었다)를 기록하느라 오래 걸릴 수밖에 없긴 했지만 7개월은 아무래도 긴 시간이었다.
2015년 8월 8일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1부 ‘로마의 일인자’를 시작으로 2부 ‘풀잎관’ 3부 ‘포르투나의 선택’ 4부 ‘카이사르의 여자들’ 5부 ‘카이사르’ 그리고 6부 ‘시월의 말’까지 모두 읽는데 3년이 넘게 걸렸다. 읽은 페이지 수만도 무려 8,319페이지에 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7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세 권뿐이다. 하지만 7부 세 권도 그 분량이 1,019페이지나 되어 언제 독서가 끝날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콜린 매컬로는 이 책 시리즈를 6부에서 마치려 했다. 공화정도 끝나가고 있었고, 로마의 일인자들이었던 마리우스도(군대를 지휘하는 데 탁월했고, 예언처럼 여덟 번이나 집정관을 지냈다), 술라도(태생이 뿌리 있는 파트리키였고, 카이사르처럼 독재관을 지냈으나, 정적에 대해서는 카이사르의 관용보다는 잔혹함을 선택했다), 폼페이우스도(피케눔 출신의 촌놈이었지만 위대한 폼페이우스라 불렸다), 마침내는 카이사르도(살아서는 신보다 겨우 한 뼘 아래의 신격을 갖추었고, 죽은 후에는 Divus 즉, 신이라 불렸다)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것을, 매컬로가 그것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매컬로가 “‘시월의 말’ 끝자락에 이르면 카이사르를 포함해 모두 세상을 떠난다. 남는 것은 그 후로도 계속되는 후대에 그들이 남긴 유산이며, 그 주인공은 카이사르의 생질손(甥姪孫)으로 훗날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최종적으로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이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나는 절대 멈추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것이 독자들의 열망을 부추겼는지도 모르겠다.
콜린 매컬로는 6부를 마무리한 후 1년 뒤 황반변성으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고,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발표(2007년)함으로써 독자들의 열망에 부응했다. 그녀는 결국 멈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