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
해가 이상하리만치 뜨겁던 날 인천에 다녀왔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열리는 전시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를 보기 위해서였다.
대강의 정보는 파악하고 갔지만 제목이 참 꾸밈없다는 사실은 전시를 보고나서 알았다.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 전시된 것들의 이름을 정직하게 나열한 제목의 이 전시를 보고 나는 ‘이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름의 가치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 자체로 정체성이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는 통로가 되는 이 단어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본 적 없는 이의 상상 초상을 그리게 하고 때로 종교나 사상을 반영하며, 누군가는 인생의 흐름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믿는 힘있는 단어. 그래서 세상의 부모들은 새 생명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사전을 뒤적이고, 기로에 선 자들은 예명을 짓거나 개명을 한다. 운명의 좌표를 다시 찍기 위해 돈을 내기도 한다. 이름이란 우리가 이토록 믿고 의지하고, 탓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들개는 언제부터 들개였나. 권도연 작가의 <북한산> 작가 노트에 의하면 서울의 ‘들개’들은 은평구 재개발 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2012년 급속히 증가했다. 재개발로 인한 집단 이주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개들이 버려진 것이다. 이윽고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순식간에 반려견에서 들개로 추락시켜 버렸다. 개는 개일 뿐.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그들을 산으로 내몰아 다정한 이름을 빼앗다 못해 위협적인 명명을 하는 것일까. 터전을 빼앗긴 개들의 초상을 보며 든 생각은 스스로 만든 희생양을 부르는 방식조차 기만적인 인간의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반면 뉴 락new rock을 보라. 장한나 작가가 바닷가에서 수년에 걸쳐 수집해온 인공물질들. 제 안에 던져버린 것들을 품고 다듬어 자연이 돌려준, 자신을 닮아버린 신기한 오브제들을 말이다. 작가는 경계와 정체성이 흐려진 이 물질을 ‘뉴 락’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들을 모아 전시장에 작업으로 설치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작업의 일부인 수조 속 물은 뉴 락에 이끼를 피우며 신 생태계를 만들고 있었으니, 인간이 무책임하게 방치하고 오만하게 파괴할 때 자연은 마치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버려진 부표에 자라난 따개비는 위대한 생명력의 상징임과 동시에 그곳이 그들의 영원한 터전이 될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일깨워 준다.
이외에도 전시는 제목이 담고있는 오늘날의 환경 이슈와 생태 현상들을 다양한 작업을 통해 보여주었다. 환경에 대한 국가주의적 접근으로서 간척사업을 바라보고 기록한 찰스 림 이 용Charles Lim Yi Yong 작가의 <씨 스테이트 9: 선언>을 시작으로, 권도연 작가의 또다른 작업 <비숲>과 김화용 작가의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는 각각 오늘날 우리가 거주하는 환경 속 실제 새들의 모습과, 수세기 전의 그림에서 오늘날의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가금류를 다루고 묘사해온 방식을 펼친다.
인천아트플랫폼의 커미션 작업인 남화연 작가의 <새로운 쾌락은 오래된 경계심과 같다>는 전시가 취하는 입장의 표방과도 같이 느껴졌다. 전시장 옆에 마련된 정원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인 ‘생태적 공존’을 전시로서 실천하고 있는 셈이었다. 정원 안에 설치된 영상 작업 <필드 레코딩>에서는 새 소리가 흘러나온다. 엄밀히 말하면 새 소리는 아니고 인간 퍼포머가 헤드폰 속 새 소리를 듣고 흉내내는 소리다. 진짜 새 소리와 인간이 따라하는 새 소리는 완벽히 같을 수 없겠지만,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는 시도로써의 사운드가 흔들리는 풀과 꽃들과 만나 관람객이 서있는 정원의 풍경을 완성시킨다.
인간-비인간의 관계성에서 더 나아가 그 엇나간 관계의 출발점이 되는 인간의 욕망에 한층 더 주목하는 영상 작업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소수민족의 터전이었던 중국 어느 고원지대의 폐기된 수력발전소에 위치한 비트코인 채굴장을 소재 삼은 리우 창Liu Chuang의 <비트코인 채굴과 소수민족 필드 레코딩>, 유류기지로 설계된 싱가폴의 거대 해저 인프라를 영화적으로 탐색한 찰스 림 이 용의 <씨스테이트식스> 등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되어 찾아보니 현대건설에서 시공했다.). 러닝타임이 긴 작업들이 많고 상영 횟수가 한정되어 있어 하루 안에 모든 작업을 보기란 애초에 불가능했지만, 스크리닝 시간을 확인하고 갔음에도 방역 지침에 따른 인원 제한으로 – 적어도 너무 적다 – 궁금했던 몇 작품은 못 보고 돌아와야 했다. 아쉬움에 문득, 바글바글한 전시장에 사람들이 반쯤 앉고 반쯤은 드러누워, 벽 한구석에 기대어 작업을 보던 코로나 이전의 세상이 떠오르는데… 그래, 이것도 오늘의 가르침이려니.
게으른 탓에 종료일에 전시 보는 일이 잦다. 그렇다보니 곧 자취를 감출 눈 앞 작업들의 몇 시간 후 행방을 상상하며 종종 맘이 헛헛해지곤 한다. 이번 전시도 비슷한 질문들을 남겼다. 전시가 끝나면 이끼 낀 뉴 락들은 어디로 갈까.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지는 않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것을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지금도 어디선가 어떤 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들개의 범주에 진입하고 있겠지? 수평아리는 인간이 세운 서슬퍼런 자본주의 잣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소멸되고 있을 것이고.
언젠가 하루는 밤길 운전 중 앞차가 밟고 지난 스티로폼 박스 조각이 흩날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흰 알갱이가 잘게 흩어져 사방으로 날리는 모습이 제법 비현실적이라 잠시 눈발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바람에 나부끼는 스티로폼이라는 걸 알아채기까지 채 2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들개라 부르는 대상은 들개이기 이전에 개다. 또한 자연에서 건져올린 미묘한 오브제에 뉴 락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지어주어도 플라스틱 조각이 진짜 바위가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이 두 이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들개라는 명명은 배타적인 반면 뉴 락이란 이름붙임에서는 일종의 자기책임적인 태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물론 자애로운 임시방편에 영원히 안주할 수는 없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좋은 전시였다. 여기엔 제목의 역할도 있는 것 같다.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정원의 소리로부터>라는 제목은 발신자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낸다. 구체적인 (반半)자연적 요소들을 발신자로 설정한 것은 호소적이면서도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매개로서 전시가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 또한 공격적이거나 지나치게 은유적이지 않아 다수 수신자의 마음을 두드렸을 것이라 예측해 본다.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게 아닌 관계는 쓸쓸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쓸쓸함 이상으로 파괴적인 잠재력을 내포한다. 전시의 입을 빌려 자연이 넌지시 제시하는 공생의 가능성에 이제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답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