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달 전에 팀장이 되었다.
작년 말,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냐는 대표 L의 물음에 업무 A를 내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는데, 몇 달 뒤 대표는 A에 B, C, D, E를 붙인 팀을 만들고 내가 그 팀을 리드할 거라고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회였다. 관리자는 내 길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기존의 포지션에서 내 존재의 의미가 약해지던 차에 적절한 전환인 것 같았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다면 더 무겁게 생각했겠지만, 무식하면 용감하고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기도 한 법.
팀장이 된 지 3주 정도 되었을 무렵, 대표가 미팅을 하자고 했다. 내가 헤매고 있는 것 같다며 현황을 짚어보자고 했다.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피드백을 받았고, 대화가 끝난 후에야 대표가 어떤 의도로 이 팀을 만들었는지 더 순도 높게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사실 아는 것도 아닌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팀의 설립의도는 깨달았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나중에 번복하게 되는 디렉션, 미숙한 매니지먼트, 부족한 실행력이 하나둘 쌓이면서 자괴감이 커져갔다. 솔직히 말하면 실제로 결과물이 좋지 않은 것보다 동료들이 내가 잘 못한다고 생각할까봐 불안했다. 흔히 얘기하는 ‘실무자일 때는 괜찮았는데, 관리자 감은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다가 코로나에 걸렸다. 팀장된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 코로나에 걸린 걸 깨달은 순간에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우울감에 시달렸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표에게 상태를 이야기하고 2주 동안 회사를 쉬었다. 병원을 알아보다 리뷰가 좋은 병원은 예약하려면 네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모님 댁으로 내려갔다.
일단 멈추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일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함몰된 삶을 살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신 날 들려준 코카콜라 CEO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생은 다섯 가지의 공을 저글링하는 것인데 일, 가족, 친구, 건강, 영적인 것(spirit)이라고 했다. 그중에 네 개는 유리공이고, 하나만 고무공인데 바로 일이라고. 일이란 공은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지만 나머지 공들은 떨어뜨리면 깨지기 때문에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몸과 마음의 건강이라는 공을 깨뜨린 상태였다.
일이 다섯 가지 공 중에 하나일 뿐이고, 고무공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왠지 다시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다음날 출근했다. 잘해보자, 잘할 수 있을 거야. 복귀 첫 날, 필수적이진 않지만 하면 좋기는 한 미팅들을 모두 없앴다. 에너지의 70%만 사용하자. 디테일이 떨어지더라도 중요한 일 위주로 하자고 계속 다짐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 난 다시 허덕이고 있다. 유리처럼 약한 마음이 다시 깨지려는 조짐이 보인다. 한 번 깨져봤더니 이제 이대로 더 가면 깨질 것을 알겠다.
며칠 전, 몇 개의 미팅을 마치고 자괴감에 휩싸여있다가 팀원 P에게 젤라또를 먹자고 했다. 젤라또는 맛있었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P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팀장으로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지만, 요즘 스스로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지점에 대해서 토로했다.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이런 이야기가 그에게 어떻게 들릴지 따윈 신경쓰지 않은 채, 답답함을 이야기했다.
내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하던 P가 말을 시작했다. 팀원들끼리 따로 만나서 종종 이야기를 나누는데 가끔씩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어쩐지 모르는 사이에 부쩍 친해진 느낌이더라니).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팀원들이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가 있는 것 같다고. P 본인은 처음에 내가 팀장으로 왔을 때 인간적으로는 괜찮은 것 같지만 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기도 그렇다고 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라고 말하고 P와 헤어졌다.
어제 아침 출근하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나갈 준비를 했다. 주차해놓은 곳으로 투벅투벅 걸어가는데 P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나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말. 처음에는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 생겼다는 말. 그래, 그거면 힘을 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아닐까.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든지 간에, 팀원들이 나를 신뢰한다는데 더 가봐야되지 않을까.
약한 나는 앞으로 몇 번이고 흔들리겠지만, 우리가 해낼 일들이 궁금해서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