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동을 아이처럼 여행하는 방법

부산 영도 여행

by 현묵


살다 보면 우린 계속 무엇인가에 떠밀리곤 한다.

어제는 일에, 오늘은 사람에, 내일은 계획에.

그러다 보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 또한 점점 어려워진다.


그럴 때 나는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바쁘게 가던 발걸음을 잠시 늦추고

재빨리 먹던 밥의 촉감을 기억하기 위해 눈을 감고

늘어지는 그림자에 속으로 인사를 건네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렇게 잠시 떠밀려가는 일상을 붙잡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순간을 사랑할 준비를 하는 것. 아이처럼 사소한 것에 눈길을 주고 귀 기울이는 것.

그게 나의 여행 방법이다.

우리는 행복이 찾아오는 찰나의 경험과 여행이라는 순간을 온전히 즐겨야 한다.


다행히 대평동은 나의 여행 방식과도 닮아있다.

멀리서 보면 허름해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 역사와 예술이 숨 쉬고 있다.

길을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멋진 벽화와

수십 년의 세월이 담긴 시, 멋진 바다를 볼 수 있는 요트 투어처럼 말이다.

여행의 순간을 즐길 수 있는 대평동으로 우리 함께 떠나자.


토요일 오전, 정신을 차려보니 영도대교 위를 걷고 있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끝으로 이어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떠나고 싶을 때마다 한 권, 두 권 넣어둔 책과

잡다한 물건들을 품은 가방이 나를 내리누른다. 날씨가 무척 좋다.

오늘은 특별히 해야 할 일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다.

보통의 날이지만 오늘이 기억에 더 남는 하루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 나는 영도대교를 지나 대평동으로 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일 목록에 ‘오늘을 행복한 날로 바꾸는 방법 찾기’라고 적어본다.



바닷바람과 브런치로 배를 채우니 그제야 대평동에 온 게 실감이 난다.

가방을 뒤적이니 책과 편지지, 만년필이 보인다.

만년필에 호- 입김을 분 뒤 편지지에 허투루 이것저것

써본다. 문장들은 사춘기를 맞이한 소년같이 이리저리 엉켜있다.


쫓기듯 계획을 따라가던 여행의 문장

스트레스로 인해 기분이 나빴던 문장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고 후회한 문장


얇은 편지지 안에 내 속마음이 훤히 드러난 것 같아 얼굴이 발개졌다.

발치에 걸리는 나뭇조각들을 괜히 부스럭대다 다시 거리로 나선다.


대평로 43번 길 3-1

사십 년, 내 생애보다 긴 세월이다.

그 긴 세월 동안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건 대체 어떤 마음일까.

그 감정을 가늠하기 어렵다.

허투루 쓴 내 문장들이 어서 걸음을 떼라며 소리 없이 외치는 것 같았다.

문득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멀어져 간다.’는 노래 가사가 귓가에 맴돈다.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나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평범한 하루를 행복한 하루로 바꾸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지만

어떤 여행은 수십 년이 넘게 걸린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다.

이곳의 어르신들은 일상을 행복한 날로 바꾸는 주문을 진작 찾으셨던 것일까.


과거 뱃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는 허름한 양다방의 마담은

땅콩을 까던 손을 휘저으며 나를 빈자리로 안내했다.

실내는 빈 듯 비지 않은 듯 작은 장식들로 가득했다.

뜨거운 쌍화차를 벌컥이며 나는 또다시 편지지를 꺼냈다.

낡은 스피커를 뚫고 나온 노래가 반겼다.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다방에 앉아 있던 자개 업자 손님이

마담과 나누는 대화가 들려온다.


"나는 삼십 년 전 이 동네에 살던 사람이에요.

이 동네는 변한 것 없이 그대로네요. 쌍화차도 그대 로고"


"맞아요. 뱃사람 대신 관광객이 온다는 게 바뀐 것 전부죠."


이내 마담은 본인이 물려받은 자개가 비싼 것이라는 자개 업자의 말에

시끄럽게 걸려 오는 전화도 마다하며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옛 대평동의 이야기가 궁금해져 여전히 비어 있는 편지지를 주섬주섬 챙겨 다방 문을 나섰다.

양다방을 나서 걷다 보니 다행히 오후에 출발하는 마을 투어의 마지막 자리에 이름을 넣을 수 있었다.

저 멀리 올라간 영도다리를 보고 있자니 투어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올라가는 듯하다.

맑은 날씨와 예쁜 구름, 갈매기 우는소리가 내 몸에서 어우러지는 느낌.

‘어떻게 하면 오늘을 행복한 날로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어느샌가 시원한 바닷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나는 홀리 듯 요트 위 난간에 기대어 섰다.

뛰어오르는 멸치 떼들과 심장 박동을 맞추고,

하늘색 구름에 이름을 붙여주며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해 본다.








영도의 역사에 대해 듣던 중

특이한 모양의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귀를 가까이 댄다.


“영도의 말은 워낙 빨라 절영도라 불렸습니다….”


이어지는 해설사의 말 사이로

아스라이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귀를 더 가까이 대니 잘게 부서지는 파도의 소리가

귓속으로 밀물과 썰물처럼 들이쳤다.


언젠가 몽돌해수욕장에서 만났던 새로운 파도 소리처럼

영도 바다의 새로운 파도 소리가 귀로 뿜어져 나왔다.


요트에서의 해방감과 배 위에서 듣는 파도 소리가 이리저리 섞인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해야 행복할 수 있구나.'


대평동에서는 알려주는 사람 없이도 이 문장을 느낄 수 있다.



“영도의 역사는 말이에요.

대평동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깡-깡- 하고 울려 퍼지는 그 소리에

주민들의 희로애락이 다 녹아들어 있단 말이죠.”


좁은 골목을 지나갈 때에도 마을을 사랑하는 이의

열정적인 해설은 멈추지 않는다.








자식을 위해 녹슨 배를 망치로 하염없이 두드리는

어머니의 그 마음을 가늠해 보고 싶다.


살다 보면 내 마음에도 녹이 슨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떠나가는 세월을 돌이켜줄 소리가 있다면 참 좋겠다.













이곳 대평동에는 발 딛는 곳마다 역사가 있다.

수십 년이 지나도 그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건,

여행자들과 주민들의 마음속에 함께 품고 살아가는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찾아온 동네에서 나는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추었다.

더러는 진솔한 말들에 발목을 잡히고

때로는 처음 본 벽화에 마음을 뺏겨 우뚝 멈추어 서고

옛것을 보면서는 헤프게 시선을 빼앗겼다.


여행의 여운이 흩어지기 전,

꼬깃꼬깃해진 편지지를 꺼내어 마침내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너, 마음이 세월에 무뎌질 때면

깡- 깡- 하고 망치 소리가 울리는 대평동으로 함께 가자."







아래는 실제 책 디자인 입니다.


부산문화도시센터, 잡지 0°C 에디터 누피, p2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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