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해 미쳐버리겠는 엄마 생활
까르르 까르르 깔깔깔
오늘은 애월 해안 도로에서 살짝 벗어난 언덕 위에 있는 카페다. 창 너머로 번진 소리가 시퍼런 바다로 떨어진다. 평균 나이가 마흔이 넘는 J 네 명의 광대가 높이 솟는다. 서로 다른 곳에서 보낸 그들의 여고 시절이 겹쳐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다 보니 시작은 살짝 어색하다. 시종일관 하이텐션인 막내 히뽀를 뺀 나머지 셋의 MBTI는 'I'가 분명하다. 이 분위기를 무장해제시킨 대화 주제는 다름 아닌 임신테스트기였다.
혹여나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새 생명을 마주해 황홀경에 빠진 모습을 환상처럼 고이 간직하고 있다면? 과감하게 Shift+Delete 버튼을 눌러 완전 삭제를 부탁드린다.
새벽까지 술 잔뜩 먹고 춤추다 잠들었거든. 쉬 마려워서 깼는데, 습관적으로 임테기를 한 거야.
근데 두 줄이 나온 거 있지. '오우 쉣'이 첫 마디었어.
임신이란 걸 확인하고 나서도 안 믿었어.
배가 나올 때까지 친한 친구나 가족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니까.
Oh, No! 소리쳤지. 남편 놀라서 화장실로 뛰어오고.
전날 디즈니랜드에서 신나게 후릅라이드랑 바이킹 타고, 데낄라 들이부은 게 먼저 생각나더라고.
좀 놀랐다. 나만 그렇게 임신이 당황스러웠던 건 아니었구나. 무엇부터 해야 하고, 무얼 내려놓아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공포와 두려움과 설렘이 오묘하게 섞인 기분으로 새 생명을 맞이했구나.
원했든, 원치 않았든, 우리의 삶은 그날 아침 소변을 본 뒤로 송두리째 바뀌었다.
한 주 동안 쓴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고지와 모니터 화면에서 만났던 활자를 입말로 하면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물풀님 글을 읽으면 좀 마음이 쓰려요.
누구의 탓도 아닌데 자꾸만 '내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아서요.
울컥했다. 다섯 번 만난 게 전부인, 이 글쓰기가 아니었으면 완전한 타인으로 살았을 J가 행간에 꼭꼭 숨겨둔 속내를 알아주어서 고마웠다.
누구에게나 엄마는 하나뿐이다. 그런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어 괴로웠다. 동시에 여전히 사랑받고 싶어서 미워하는 마음을 토해내버리고 싶었다. 미움을 크게 말해야 했다. 엄마에게 상처가 될 말들을 또박또박 쓰고 맞춤법 검사까지 하는 내가 징그럽기도 했다. 내가 쓴 글과 뱉어낸 말에 엄마가 얼마나 상처받을지 크게 걱정했다. 한데 이런 건 내가 아닌 엄마의 영역이라는 확신이 다다랐다.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든 엄마는 그걸 버텨낼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을 거다. 내 아이가 커서 나에게 비슷한 말을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는지 상상해 본다. 아마도 나는 진심을 다해 미안함을 전하고, 인내하며, 더 큰 사랑의 시간을 가지려 노력할 것이다.
엄마와 나 사이에 불던 소슬한 바람이 그저 멈추길 기다린다. 웅크리지 않고 무언가를 쓰면서 기다린다.
엄마들의 '임신-출산-육아' 이야기는 군필자들의 '훈련소-훈련과 축구-민방위' 스토리라인처럼 아무리 지껄여봤자 소용이 없다는 데에 공통분모가 있다.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도 나보다 힘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각자의 상황이 가장 힘들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도 자신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하며 깔깔깔 웃을 수 있는 건, 다 지난 일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못한 상황을 접하면 은근 위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한 달 여 동안 우린 J가 되었다. J는 이제야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돌아보고 자라나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그 누구의 일도 아닌 자신의 말을 찾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각자의 육아 현장과 일터 속에서 이루어냈다. 이렇게 글로 써서 뭐하나, 현타가 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의 마음을 뽑아내기 위한 J들은 성실히 자신을 파냈다. 후벼 파는 상처와 기억의 덩어리를 문장과 문장으로 이어 붙여 시원하게 떼어냈다.
제주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삶에 관해서라면 그 어느 때보다 좋은 글을 쓰고 싶지만, 이미 실패했다는 걸 잘 안다. 애쓰면 애쓸수록, 손은 더디게 움직인다. 마음을 쓰면 쓸수록 문장들은 범람해 어디론가 흩어진다. 그럼에도 둥둥 떠오르는 생각들은 결국 '엄마 됨'에 관한 것이었나 싶다. 우린 이제 빼도 박도 할 수 없이 남은 생의 많은 부분을 엄마로 살아가야 한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따라가다 수도 없이 넘어졌지만 일어섰다.
이로써 엄마 생활은 어느 정도 완연해졌다.
내가 나인 그 자체로 엄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미움이 머물던 자리에 새겨 넣는다. 엄마인 동시에 '나'이길 성실히 갈망한다. 세상이 강요했던 '엄마 됨'에 더는 놀아나지 않는다.
J들이여, 모여라. 뉴노멀 시대의 앙데팡당 맘스(Independant moms) 나가신다.
<J, 완연한 엄마 생활> 다섯 번째 모임 일지 끝. / 물풀
제주에서 글 쓰는 네 명의 J
유쾌한 여린 감성, 물풀(글 쓰는 밖순이 엄마)
온화한 카리스마, 미오(예술하는 엄마)
펠롱펠롱 눈동자, 하다(그림 가르치는 엄마)
시종일관 하이텐션, 히뽀(철없는 N잡러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