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리스크’란 변명,
다음은 총수의 시간

기자의 두 번째 리드④

by 무민

‘총수 부재’

그간 삼성의 부진은 이 단어로 요약됐다. 삼성과 ‘친삼성’이 그렇게 외쳐왔다.


부재를 강조한 배경은 사법 리스크다. 이재용 회장은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2017년 2월 기소됐고 2021년 8월 가석방됐다. 하지만 국정농단 사건과 연관이 있는 삼성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으로 2020년 9월 다시 재판에 넘겨졌다. 이 사건의 상고심 선고기일은 이달 17일 열린다. 앞선 1·2심 판단은 모두 무죄였다. 대법원이 판결을 확정하면 이재용 회장은 약 8년 만에 사법 리스크를 모두 턴다.


법원 밖을 나서는 이재용.png 이미지=챗GPT


이미 많은 이들은 이재용 회장의 무죄가 확정될 경우 족쇄를 풀고 경영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고한다. 형사재판이 이재용 회장의 경영활동을 방해해 삼성이 부진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논리다.


친삼성의 입은 이재용 회장이 기자들을 만나도 침묵을 지키는 데에 비슷한 취지로 설명한다. 현장에서 만나는 이재용 회장은 기자들 질문에 아예 입을 열지 않거나 동문서답한다. 기자들은 “이럴 거면 왜 공항에 부른 거냐”고 삼성 홍보팀에 불만을 내뱉곤 했다.


“사법 리스크가 끝나면 전보다는 훨씬 말씀 많이 할 거예요.”

지금은 트집 잡힐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있다는 게 취재원의 전언이다. 누군가는 “한 번 감옥에 갔다 오지 않았냐”며 “두 번 들어가는 건 정말 피하고 싶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배경이라면 사법 리스크가 이재용 회장의 발목을 잡는 게 사실인양 보인다.


하지만 삼성 수준의 글로벌 기업이 오롯이 총수에만 경영을 맡긴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는 않는다. 총수 개인의 판단이 제일 중요한 ‘총수 경영’이 아니라 이사회 등 시스템에 의한 경영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다.


삼성 스스로도 ‘시스템 경영’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시계를 2014년까지 되돌려보자. 당시 삼성을 이끌던 이건희 회장이 병환으로 입원해 삼성은 총수 부재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삼성은 ‘시스템의 삼성’이라며 경영활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당시에는 삼성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이 존재했다는 게 차이점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삼성에 컨트롤타워가 없는 것도 아니다. △사업지원TF(전자계열) △금융경쟁력제고TF(금융계열) △EPC경쟁력강화TF(건설계열) 등 세 개의 TF가 그룹 전반을 조율한다.


특히 삼성 2인자가 있는 사업지원TF는 그중 핵심으로 꼽힌다. 복수의 취재원들은 전자 계열사의 경우 사업지원TF가 허락하지 않으면 사소한 홍보아이템도 외부에 알리지 못한다고 전한다. 미래전략실과 비교하면 위상은 낮지만 여전히 그룹을 통솔하는 조직이 군림하는 상황이다.


물론 총수 부재가 중요한 경영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는 있다. 기업 인수합병(M&A)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삼성은 이재용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올해 5월 유럽 공조기기업체 플랙트그룹을 약 2조 4000억 원에 인수했다.


삼성 경영권 불법승계 2심 판결이 무죄로 나왔으니 이러한 결정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면 지난해 사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초 삼성은 냉난방공조기업 존슨콘트롤즈 인수를 검토했다. 이 사안에 밝은 취재원은 삼성전자가 입찰가격으로 8조 원을 써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인수는 불발됐지만 이재용 회장의 1심 재판이 끝난 직후였음에도 삼성은 8조 원의 투자 계획을 잡았다.


M&A에 관한 두 사례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경영활동에 큰 제약이 없었거나, 이재용 회장이 부재하더라도 ‘시스템의 삼성’이 작동했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사법 ‘리스크’란 표현은 이재용 회장의 재수감을 피하기 위한 구호에 가까웠다. 동시에 오늘날 삼성 부진의 원인을 삼성 내부가 아닌 외부로 돌리기 위한 명분으로 해석된다.


남은 상고심에서 이재용 회장이 무죄를 확정받는다면 그는 앞으로 경영능력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 사법 리스크 때문이라는 책임 회피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과도 실패도 이재용 회장의 이름으로 남는다. 성과가 나온다면 그건 이재용 회장의 능력으로 평가될 거다. 삼성과 ‘친삼성’이 그렇게 말할 거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그때는 어디로 화살을 돌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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