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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Jan 31. 2024

부모의 이혼, 이혼 가정의 대대대 대물림…

이혼한 전 배우자의 험담을 멈춰야 하는 이유

 나의 어머니는 이혼 가정의 대물림 속에 크셨다. 이복동생들과 새어머니의 멸시와 차별 아래, 성인이 되자마자 식당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서울로 상경하셨고, 후에 아버지를 중매로 만나 결혼한 후 또다시 이혼하셨다. 이후 아버지는 국제결혼으로 재혼을 하셨고 집을 떠나 버린 상대방 덕에 다시 또 한 번 국제결혼을, 그리고 5년 후 다시 이혼을 하셨다. 나는 이혼 가정의 대, 대, 대, 대물림에서 자라 어머니의 소원처럼 내 세대에서 '이혼'이라는 족쇄를 끊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딸은 자라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고 또다시 '이혼녀'라는 낙인을 찍게 되었다. 이쯤 되면 이혼이 유행인지, 아니면 불안정한 상태로 자라온 이혼 가정의 아이들은 결국 이혼을 가보처럼 대물림을 받게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대, 대, 대, 대물림이란 어머니의 윗 세대까지 포함하여 나까지 총 4번의 이혼이 거쳐갔다는 뜻이다.


#1



실제로 이혼 가정에서 겪게 되는 내리 이혼, 이혼 대물림은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 또 다음 세대로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 고민해 보건대 이건 인내심이나 보고 자란 환경에서 빚어진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저, 이혼이라는 이유 하나로 한 아이의 우주는 반으로 갈라지고 그 안에서 아이는 '상실감'과 세상의 새로운 이면을 맞이하게 됐을 뿐이겠다.


부를 대상이 한쪽은 없어지고 또 다른 한쪽은 존재는 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로 바뀐다는 것이 또 한 번 아이러니다. 부족함이 생겼는데 부족함이라 표현하지 못하고 되려 한쪽 부모의 부재를 오롯이 아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 그저 불공평할 뿐이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장성하고 영영 보지 못할 것만 같았던 다른 한쪽의 우주도 십년 뒤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때쯤 만난 부모는 또 다른 누군가가 옆자릴 꿰차고 있다. 반갑지 않아도 이해할 수 없어도 아이는 또다시 그런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른들의 독단적인 선택과 결정은 늘 그렇듯 아이의 의견 따위는 필요치 않다.



#2



"소리 없는 총이 있다면 네 애미를 죽이고 또 죽일 거야.", "네 애미 닮아서-", "네 애미, 니미!!"

어린 유년기 시절 때부터 줄곧 들어왔던 말이다. 어렸을 적 니미라는 단어가 따로 있는 줄 알았다. 달리 말하면 '네 애미', 나의 엄마라는 단어의 뜻이 니미였다. 그 단어를 듣게 되는 날이면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지 않았거나, 방청소를 하지 않아 어지럽혀져 있거나, 아버지의 말을 거역해서 화가 나셨거나 했을 때 그럴 때 꼭 아버지는 이런 욕지거리를 하셨다.


그 당시에는 이런 욕도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어서 그 단어를 듣는 게 무척 힘들었다. 원망과 애증의 관계, 나와 어머니의 관계는 이전의 엄마, 딸의 관계가 아니었다. 그 상황을 만든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원망이 크셨다. 내게 어머니의 험담을 하시고, 빚에 대한 근원지, 보증을 서준 어머니의 선택, 우리를 버리고 간 이유, 헤어지고 나서도 양육비를 지불하지 않는 데에 대한 혐오감 등을 가감 없이 내지르셨다. 그리곤 소리 없는 총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총이 있다면, 그런 총이 생긴다면, 그땐 꼭 네 어미를 죽이겠노라고…


#3


공포스러웠다는 말밖에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다. 아버지가 본인의 분에 못 이겨 화가 났을 때 어머니를 향한 원망은 극에 달한 듯 보였다. 이럴 때면 나는 내가 존재하는 자체 이유 하나만으로도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았다. 잘못했다고 빌며 아버지의 화를 풀어 드릴라치면 아버지는 효자손이나 파리채 같은 것으로 매타작을 하셨고, 얼마 안 있어 작은 방으로 홀로 들어가 화를 삭이셨다. 그게 우리의 훈육 방식이자 어머니가 없는 이혼가정의 일상이었다.



#4


매타작을 하는 날이면 아버지는 눈을 꼭 감고 자는 척하고 있는 나와 언니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미안하다며 엉엉 우셨다. 흐느끼다, 엉엉 울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실 때쯤 이내 눈물을 감추고 다시 홀연히 방으로 들어가셨다.


울지도 눈을 뜨지도 못하는 나는 그런 날이면 마음이 몹시 힘들었다. 나는 왜 태어났으며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힘든 걸까, 나는 왜 아버지를 힘들게만 하는 존재일까 하는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존재의 가치, 무가치함을 느끼며 어려서부터 느끼는 감정은 나는 존재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어린 날의 기억이다. 예닐곱 살의 나이에 나는 우울과 절망을 느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어린 날의 잊고 싶은 기억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기억들의 대다수는 불과 어제의 일같이 생생하다.



#5


6살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까지 매일 같이 들었던 어머니의 원망과 험담은 내가 다 자라고 나서야 진위여부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원망의 기저는 그저 두 딸아이를 키우며 먹고살기 어려웠던 아버지의 원망이었다.


독단적 이혼, 빚을 나누지 않기 위해 했던 이혼, 잘못된 보증을 서 준 대가의 이혼. 내 어머니는 보증을 서 준 대가로 우리를 잃었다. 아버지는 그 일로 어머니를 평생 우리의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분노가 일었다. 아버지의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분명 우리를 키우기 싫어서, 나쁜 엄마라 우리에게 연락을 하거나 찾아오지 않는다 했었다. 무려 십여 년을 그렇게 아버지의 험담과 거짓말로 어머니를 원망하며 살았는데…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원망할 대상이 없어졌다. 원망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나는 나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혐오는 이때부터 시작이 아니다. 그전부터, 훨씬 이 전부터 쭈욱 그래왔듯 그러했다. 이혼도 대물림, 원망도 대물림. 아버지는 대체 내게 어떤 마음과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자라길 원하셨던 것일까.


#6


행복해야 할 유년기의 기억은 온통 이혼의 잔재로 남아있다. 부정적인 감정과 불편했던 기억들로 뒤엉킨 채 씁쓸하고 비릿한 유년기의 기억이다. 어쩜 꺼내어 보기도 싫은 불쌍하고 참혹했던 기억이다. 분명 즐거웠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있어도 기억이 유실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이후 나의 아버지는 30년이 넘게 불면증으로 수면제를 드시고 잠을 청하셨고, 나는 아직도 유년기의 그 시절 상처받은 그때의 소녀를 체 치유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7


어머니의 이혼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던 아이는 자라나 다시 이혼을 했다. 나의 가정은 '외도와 배신'으로 얼룩졌으며 두 아이의 우주는 나의 '선택적 이혼'으로 인해 반으로 갈라졌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원망하는 일을 끊어내는 일이다.


아버지가 내게 줬던 어머니의 원망과 혐오감은 아이들에게 절대 물려주지 않는다. 설사 내가 상대 배우자에게 미움과 원망을 안고 있더라도 그 감정을 오롯이 아이들에게 표출해 내지 않는 방법을 나는 택하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이전 배우자의 험담은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자기혐오로 이어짐을 알고 있기에, 절대 그 수순을 밟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8


소리 안나는 총이 있다면, 정말 아버지는 어머니를 쏴서 죽일 수 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는 본인이 자행한 이혼에 대한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후회하셨던 걸까… 아버지는 우리가 성인이 되어서야 결국 그 험담을 멈추셨다. 하지만 어머니의 왜곡된 기억과 유년기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왜 정서적으로 완전하지 못했던 내게 그런 험담과 폭언을 했던 걸까. 아니, 환경과 변화와 내가 직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혼을 두 분이서 하시곤 왜 내게 그 화를 분출하셨던 걸까.


불안한 마음을 알아주고, 보듬어주고, 슬프고 속상한 마음을 달래주시고 위로해 주셨다면, 아니, 그 화를 우리에게 쏟아내지 않으셨다면. 어린 자식들에게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자신의 감정을 흘려내지 않으셨다면… 그랬다면 어른이 되어서 이토록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았을 것 같다.




#9


내가 쓰는 글 들은 부모님의 이혼, 나의 이혼, 이혼 후의 가정에 대한 모습과 불우했던 유년기를 담았다. 눈물을 꾹꾹 참고 써 내려가는 일기장이 아닌, 모두에게 공개된 공간에서 나의 외침이 어떤 이에게는 이혼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미루어 보길, 또 어떤 이에게는 용기를 내서 선택을 하길 독려하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따로 살게 되는 부모님과 그 가정 안에 크고 있던 작은 아이들이 자라나 나처럼 이혼의 쳇바퀴를 또다시 밟지 않길 바란다.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말들과 떨어지게 된 부모님에 대한 존중, 아이들이 불안해하는 마음을 헤아려주고 충분히 지속적으로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을 잠재워 줄 수 있는 부모가 되길, 그리고 이혼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었어도, 당신의 감정으로 인해 아이에게 그 감정을 전이하지 않길, 아이가 부모의 부재로 혼란을 겪을 때 든든하게 지지해 주며 위로해 주길…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분노로 본인 자신을 평생 괴롭히며 살아가지 않길 바라본다.


나를 믿어주는 단 한 명의 어른이 존재한다면, 그 아이는 절대 비뚤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아이는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



사진출처 <Pinterest>



아버지는 화가 나지 않으셨을 때 모든 이에게 친절하고 착한 분이셨습니다. 자라오면서도 아버지께 큰 반발 없이 착한 딸로 살아왔던 저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파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했던 어머니의 원망의 화살촉은 아직도 제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망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기에 이제 다 큰 딸이 되어 아버지를 그저 이해해 보려 합니다. 원망하는 마음이 나를 좀먹지 않게, 그리고 그분의 마음이 더이상 병들지 않게 치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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