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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Feb 07. 2024

음표를 못 보는, 내 꿈은 피아니스트

절대음감의 속이야기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생활기록부에 적어내는 나의 장래희망란은 언제나 '피아니스트'가 적혔다. 7살 때부터 줄곧 배웠던 악기는 피아노였다. 나의 아버지는 막노동부터 대리운전기사까지 여러 일을 하며 어머니의 빚을 갚고자 열심이셨다. 이후 건강상의 문제였던지 모르겠지만, 육체적으로 힘을 많이 쓰는 일은 뒤로하고 어린아이들의 학원을 운행하는 운전기사가 되셨다. 어느 때는 속셈학원의 운전기사로, 또 어느 때는 피아노 학원의 운전기사로, 시간표를 빽빽이 하곤 여러 아이들을 픽업 후 하원해 주는 일을 꽤 오래 하셨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처음 배웠던, 유일하게 오래 다녔던 학원은 피아노 학원이었다. 동네에 흔히 볼 수 있는 적당히 낡은 간판, 큰 규모의 학원은 아니었지만 피아노 다섯 대 정도는 보유하고 있던 이 피아노 학원은 원장님의 실력과 가르침이 좋았던지 콩쿨에 나가 입상을 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1

남들보다 내성적이고 표정에도 그늘이 져있던 내게 피아노 학원은 악기를 다루는 일로 하여금 나의 어려운 환경을 잊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도 그럴게 건반 하나하나를 눌러보았을 때 나는 피아노의 음은 대체로 듣기 좋았다. 제대로 칠 줄도 모르고 음표도 계이름도 볼 줄 몰랐지만 건반 하나하나를 눌러보며 피아노가 가진 매력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때 가졌던 생각은 이런 피아노라면, 언제든 건반을 뚱땅 거리며 쳐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는 거였다. 그만큼 피아노의 깨끗하고 맑은 소리는 듣기 좋았다.


하얗고 까만 건반 위에 손가락을 계란을 움켜쥐듯 살짝 쥐어 올리고 건반 위를 누르면 피아노를 칠 수 있었는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세에 집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내 손가락이 풀어지듯 건반 위에 퍼지면 그때마다 피아노 원장 선생님의 30cm 자가 손등을 때렸다. "그렇게 하면 안 돼, 다시 해봐.", "다시, 다시!" 그녀는 꽤 엄격했다. 기본기를 제대로 숙지하지 않으면 손등과 손가락을 자로 연신 때려대는 통에 맞지 않기 위해, 혼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녀의 불호령이 불 보듯 뻔했고 주눅이 들었던 나와 언니는 피아노 수업이 진행되는 1시간 내내 긴장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2

피아노 음을 익히고, 계이름을 어느 정도 읽게 될 수 있었는데 이 후가 문제였다. 막상 계이름은 잘 읽긴 읽었는데, 피아노를 치려고 하면 악보에 있는 박자표와 음표, 쉼표 등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외에도 표기되어 있는 기호 중 상형문자와 비슷해 보이는 음표인 플랫과 샤프 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기본적인 이론이 학습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피아노를 치다 말다 주저하기를 반복했다. "... 선생님, 이거.. 모르겠어요..." 그녀는 손을 반쯤 들어 올려 조심히 선생님을 부르는 내 모습을 보고 성큼성큼 다가와 어떻게 건반을 쳐야 하는지만 일러주고 다시금 다른 친구들의 수업을 지도했다.


나는 음표를 볼 줄 몰랐다. 피아노를 치는 자세와 계이름을 읽는 법. 그 외에는 음표와 쉼표가 잔뜩 그려진 A4용지 몇 장이 다였다. 그것들을 외우고 익혀야지만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것들을 몰라도 피아노 수업은 계속됐다. 그저 음표를 모르지만 계이름을 읽을 수 있는 것과 음감으로. 겨우 겨우 바이엘을 뗐고, 체르니를 뗐다. 아니, 뗐다고 하는 표현도 잘못되었다. 음표를 모르는데 음을 듣고 계이름을 읽은 뒤 그녀가 피아노를 치는 방식대로 외우고 그 음을 따라 쳤고, 그녀는 내가 음표와 쉼표, 박자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3

바이엘 상하, 체르니 100번, 체르니 30번. 나는 순서대로 피아노 교재를 뗐다. 누군가가 '체르니 너 몇 번까지 쳐?'라고 하면 '체르니 30'이라 답하면서도 속으론 나의 무지가 부끄럽고 창피했다. 간단한 악보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내가 체르니 30이 무슨 소용이고 체르니 100이 무슨 소용인가 적잖은 회의감이 들었다. 나와 함께 피아노 학원에 등 떠밀려 왔던 언니는 바이엘을 상까지밖에 떼지 못하고 중도 포기를 선언했는데, 2년이 되도록 바이엘 교제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의 무관심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시절 6년 내내 전교 상위권에 있는 우등생, 전교 학생회장, 반에서 늘 1등을 거머쥐었던 언니도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짐작해 보건대 우리는 피아노 학원 차량을 운행하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공짜' 학원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아이의 학원비를 무상으로 지원해 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그녀는 아버지께 우리가 항상 피아노를 너무 잘 쳐서 놀랍다고 칭찬을 했고, 뒤로는 지도를 5분도 체 안되게 가르쳤다. 피아노를 쳐야 할 페이지를 펴고, 먼저 악보를 연주한 뒤 이후 우리가 한번 따라 치는 것을 봐주는 정도. 그것이 그녀가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가르침이었고 이후 나머지 55분은 자유수업으로 끝이 났다.


#4

음표를 모르고 피아노를 치는 나. 아이러니하지만 그때의 나는 듣는 귀가 조금 트였었다. 모른다고 말하면 혼나고 주눅이 들 것 같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녀가 연주하는 음을 듣고 정확하게 건반을 눌러 따라 쳐댔던 게 아마도 절대음감 비슷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던 계기였다. 가요 top10이 인기가 절정이었을 무렵, 인기 가요를 악보로 하나씩 만들어 문구점에서 팔고 있었는데 나는 반복적인 훈련으로 인한 절대음 덕분에 친구들이 300원, 500원씩 사모으는 가요 악보를 사지 않고 스스로 음을 생각해 내고 해당 가요를 연주했다. 피아노로, 또는 멜로디언, 또는 리코더로 가요를 듣고 연주하는 통에 언니는 내게 음악적 재능이 있지 않을까 하며 놀라워했고 본인의 친구들에게도 나의 절대음에 대해 자랑하기까지 이르렀다.


'나는 음표를 읽을 수가 없는데..' 항상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왜 그때는 음표를 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건지, 아버지께 이야기해서 처음 기초부터 다시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를 왜 못했던 건지. 그때를 떠올려 보면 답답하기만 하다.


#5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큰 마음을 먹고 중고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으셨다. 그때 그 시절에는 집에 피아노가 있으면 꽤 잘 사는 집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고가의 악기였는데 아버지는 내가 음으로만 듣고 치는 교회 성가대, 찬송가가 꽤 듣기 좋았던지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피아노를 구입하셨다고 했다. 그때부터 주말이 되면 아버지는 내 옆에 앉아 찬송가를 부르셨고, 나는 아버지의 노랫소리에 따라 박자를 맞춰가며 피아노 반주를 쳤는데 그때부터가 고역이었다. 최소 1시간에서 두 시간가량 이어지는 피아노 연주. 그것도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내게 아버지가 찬송가를 부르고 그에 맞춰 연주를 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아니, 죽을 맛이었다. 특히 잘 알지 못하는 찬송가는 어렵다는 핑계로 다음 곡으로 넘어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가 나의 실력에 실망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했었다.


항상 같은 곡 위주로 치게 되니 그런 곡들 역시 연습이 늘어 반주하는데 별 무리가 없을 정도가 되자 아버지는 내게 기대하셨고, 장차 내가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아버지께 훌륭한 딸로 자리하길 원하셨다. 그때부터 주말은 아버지의 찬송가 반주를, 그리고 자유 시간에도 계속해서 피아노를 뚱땅거리며 쳐야 했고, 바이엘을 체 떼지 못했던 언니는 피아노를 칠바에 그 시간 동안 공부를 하겠노라며 연주하기를 거부해서 이 집 안에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피아노가 너무너무 싫어지기 시작했다.


#6

어느 날은 아버지의 계속되는 피아노 연습에 이골이 나서 연주하기를 거부했는데 이내 돌아오는 말은 폭언에 가까운 말이었다. "이 xx야, 비싼 피아노 사줬더니 왜 연습을 안 해, 왜! 네가 이거라도 해야지, 잘해야지. 그러려고 사준 거 아니야? 하루에 무조건 2시간씩 쳐 무조건." 나는 없는 형편에 피아노를 사달라고 졸랐던 적이 없었다. 건반을 뚱땅 거리며 치는 피아노는 그저 내게 놀이이자 소리를 즐기는 시간이 다였을 뿐. 피아노를 가지고 싶은 욕심도, 피아노를 잘 쳐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내가 반주하는 찬송가와 ccm이 좋다고, 행복하다고 하여 학원에서 원장 선생님의 연주를 듣고 연습한 게 고작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피아니스트이자, 꿈의 근원지 같이 보였다. 하지만 내게 피아노는 창문으로 끌어다 밖으로 던져 와장창 깨부숴버리고 싶은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아니, 어떨 땐 피아노의 덮개가 내 열 손가락을 전부 덮쳐 쾅 닫히고 나면 손가락이 심하게 골절되어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되는 상상을 했을 정도였다.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을 뿐 이런 나쁜 상상은 계속되어갔고, 아버지의 피아노 사랑은 여전히 계속됐다.

#7

어느 날은 아버지가 함께 다니고 있던 교회에서 성가대 팀 피아노 연주를 하시던 분께 나를 소개했다. "애가 좀 웬만큼 피아노를 치는데, 자격이 되면 반주도 좀 가능합니까?" 이윽고 나는 자리에 앉았고, 하얀 종이 위 오선에 해독할 수 없는 암호만큼 그득한 음표와 마주한 체 하나의 음도 쳐내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내게 피아노 반주에 집착하지 않았다. 내가 정말 부족한 부분이 있었구나를 실감하신 눈치였다. 그것이 나의 노력의 부족이었던지, 그녀의 방임에 가까운 교육이었던지에 대해는 달리 묻질 않으셨다. 그저 내가 본인이 기대한 피아니스트에 부합하는 사람은 아니었구나 정도만 깨달으신 눈치였다.

#8

악보를 볼 줄 모르는 뮤지션 중 가장 대표적인 뮤지션은 비틀스다. 비틀스는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으로 꼽히는 4인이었는데 멤버 4명 모두 악보를 전혀 볼 줄 모르는 상태에서 악보 없이 몸으로 소리를 그대로 표현하고 현존하는 소리와 음악을 다발적으로 표현해 냈다. 한 사람이 허밍을 하며 흥얼거리면 즉석에서 가사를 만들고 기타 코드를 기록해 멜로디를 기억하였고, 위의 내용을 적은 종이만을 갖고도 서로가 완벽하게 연주를 했다. 때론 이 점들이 다른 뮤지션들과 함께 곡을 녹음할 때 불편함을 안겨주었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채로운 음조를 써서 음악을 만들고,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음악을 했던 그들의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고, 항상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명곡들로 유명해졌다. 악보를 못 보는 그들의 치명적인 결함이 비틀스의 음악을 혁신했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이밖에도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에릭 클랩튼, 테일러 스위프트, 라이오넬 리치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뮤지션들 역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음을 표현해 내고, 악보를 읽지 못하면 대신 곡을 그대로 귀로 듣고 따서 연주를 했다. 완벽한 귀카피란 이런 것일까. 하지만 음악 이론을 몰라도 그만큼 듣는 귀가 열려 있고 새로운 발상을 할 수 있어 천재에 가까운 뮤지션으로 불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활기록부 첫 장 장래희망란엔 4년 넘도록 항상 나는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다. 나의 꿈이 아닌 아버지의 꿈이 자리매김한 장래희망. 내 어린 시절 장래희망이었던 피아니스트는 아버지가 그토록 갈망하신 꿈이었을까. 하지만 이후로 내가 장래희망란에 적었던 꿈은 '현모양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두 꿈을 실현하지 못했고, 이내 다른 꿈을 꾸며 현실을 살아간다.


사진출처 <Pinterest>



음표를 읽을 줄 몰랐던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자면, 유일하게 내가 잘할 수 있었던 것이 피아노였고, 연주를 하는 동안은 오롯이 그 시간에 흠뻑 빠질 수 있어서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악보를 제대로 보고 연주할 줄은 몰라도, 귀로 듣고 음을 재현해 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었는데요. 해가 거듭될수록 결국 내가 가진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숨기고 싶은 마음에 죄책감까지 들었던 어린 날의 추억입니다. 그때 제대로 배웠다면, 저는 성인이 되어서도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을까요? 글쎄요. 장담할 순 없지만 아마도 저는 피아노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언니와 제 기억에 피아노는 억지로 해야만 하는 악기이자, 아버지의 찬송가를 반주해야 한다는 무거운 사명감만이 자리했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하는 교육. 사실 아이를 키우며 항상 하는 고민이지만, 저는 제 아이가 자라서 어떤 꿈을 꾸게 되더라도 제 강요로 인해 장래희망이 좌우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장래희망보다는 본인이 하고 싶은 꿈을 꾸었으면 하고요. 그저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의지를 갖고 장래희망이라는 타이틀에 갇혀 꿈을 제한하지 않길, 세상을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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