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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Feb 25. 2024

남의 불행 위, 나의 행복… 샤덴프로이데

기쁨의 원천은 결국 나 자신 안에 있는 것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는 독일어로 남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을 말한다. Schaden은 손실과 고통을, Freude는 환희와 기쁨의 합성어로 독일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일본의 한 의학대학원에서는 샤덴프로이데가 생기는 동안 뇌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실험을 통해 직접 확인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먼저, 실험 참가자들 전원에게 가상의 시나리오를 주고 읽으며 자신을 주인공으로 생각하도록 하고, 등장인물들의 대학 생활과 사회에 진출한 뒤 동창회에서 다시 만난 이야기로 묘사된 내용을 통해 이때 뇌에서 나타나는 반응을 기능성 자기 공명 영상 장치로 촬영해 분석해 냈다. 결과는 놀랍게도 강한 질투를 느끼는 이들에게는 불행이 닥쳤을 때 우리 뇌는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위와 같은 실험 내용을 보면 살면서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간단한 예로 sns 상의 보이는 모습에 좋아요를 누르며 타인의 삶에 관심을 쏟고 자꾸만 시기심을 키우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기심은 이처럼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이자 불행이다. 결국 불행한 상황에서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욕망하고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심을 품게 되는데 이는 나 자신이 얼마나 얄팍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내 삶이 어째서 만족스럽지 못한 지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즉 타인의 성공과 행복을 보고 부러움과 불만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기심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불행에 더욱 직면하게 하게 될 뿐이다. 나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그 이면에서 나오는 결핍과 불안은 얼마나 나 자신이 나약한 사람인지를 느끼고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장과 발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1

이혼을 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즈음, 뭐 대단한 이혼이라고, 내가 처한 상황을 굳이 내 입으로 말하나 싶어 함구하기로 했다. 그런 중에도 나의 이혼에 대한 소문은 삽시일반으로 퍼지고 더 나아가 조금은 극단적으로 부풀려져 누군가의 안줏거리로, 또 누군가의 지탄거리로 오르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옛말에 좋은 소문은 걸어가고 나쁜 소문은 날아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나의 이혼에 관한 소문은 날개를 단 듯 저만치 멀리멀리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한 번은 일을 하고 있던 중 연락을 일 년에 체 한 두 번도 할까 말까 한 동창이 전화가 와서 괜찮냐, 많이 힘드냐 하는 심심치 않은 위로를 듣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이 친구는 내가 혼인 생활을 하고 있을 때의 거주지에도 살고 있지 않거니와, 나와도 꽤나 먼 거리에 위치해 있어 왕래가 뜸해진 지 오래된 친구였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한테 내 이야기를 들었는지 구태여 묻지 않았지만 '나쁜 소문의' 시발점과 근원지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말은 퍼져 나갈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 화제의 주인공은 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뿐이었다.



#2

- 나쁜 소문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라 - 쇼펜 하우어


수많은 입에서 중상모략하는 말들이 튀어나오고 때때로 이 소문 하나 때문에 내가 가진 명예에 적지 않은 실추와 치욕을 가져올 때, 이 나쁜 소문이 가진 영향력은 막대하다. 나쁜 소문은 마치 꼬리표처럼 나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붙어 다니며 따라다녔다. 이쯤에서 나는 인간의 이중성과 시기심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쿵저러쿵 나에 대해, 나의 가족들에 대해 저평가하기 이전에 타인은 '나'라는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질투와 적의가 가득 찬 적개심을 토대로 내가 가진 약점을 교묘히 녹여내 사실보다는 조금 더 극단의 상황으로 부풀려 내었다. 나쁜 소문을 만들어 냈을 때, 이 소문의 근원지가 어디였던지, 그 나쁜 소문을 다시 내 귀를 통해 전해 듣는 일은 생각보다 괴로웠고, 참담했다. 비열한 사람들의 입 소문에 여느 사람은 쉽게 믿어버리고, 내게 그 일의 진위 여부를 가리지 않았으며, 또 여느 누구는 궁금함에 못 이겨 이 나쁜 소문이 진짜 인지를 확인사살 하며 본인의 궁금증을 해소시켰을 뿐. 그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소리 없는 바람 따위만 지나갔을 뿐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후회는 메아리와도 같았다.

#3

- 남의 불행과 나의 행복, 또는 위안 내지 위로…


고등학교 시절 남들보다는 빠른 결혼과 출산, 이혼을 경험했던 친구는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집을 나왔고 그 길로 해당 지역을 벗어나 사회생활을 하다 만난 남편과의 인연으로 재혼에 이르렀고, 이민을 간 후 예쁜 자녀를 낳아 키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의 어렸을 때 시절을 생각해 보면 부모의 부재로 인해 외로움을 많이 느끼며 누구보다 빠른 결혼생활을, 성년이 되기를 고대했던 친구였기에 멀리에서 친구의 행복을 응원했다. 그러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친구는 시댁과의 분가 및 맞벌이, 육아에 대한 고충을 토대로 내게 장시간 하소연을 풀어내며 본인의 상황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안타깝지만 술에 힘을 빌려 전화를 했고 두어 시간 이상 계속된 통화 중 상당 부분은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이혼을 해야 할까 라는 질문이었다. "너는 해봤잖아. 이혼해 보니 어때?", "이렇게 살 거면 이혼하는 게 낫지, 넌 이혼하니까 어떤 것 같아?, 나도 진짜 그만하고 싶다" 친구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나는 친구의 안타까운 상황에 같이 공감을 하며 위로를 보내다가도. 이혼을 해본 자, 홀로 아이를 키우는 상황에 대해 묻는 친구의 말에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물론 그녀의 고부 갈등, 남편, 육아에 대한 고충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 어려움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이혼으로 가는 것을 택하는 게 나은지에 대한 것은 내가 판별해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혼녀다. 이혼 소송을 하고 홀로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외벌이이자 편모이다. 자녀들은 원하지 않았던 이혼과 현 상황일 수 있고, 가족들은 나의 이혼으로 적지 않은 충격과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누군가의 이혼에 동조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그 통화를 끝으로 그 친구와의 취중진담 같은 통화는 더 이상 하지 않겠노라고 다음 날 문자를 보내두었다. 그리고 현재 그 친구는 여전히 시댁과 복작복작하게 지내며, 맞벌이를 하고 있고 남편과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없다. 그녀가 나의 불행을 토대로 행복을 느꼈을 망정, 나는 그녀가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게 되었단 사실 하나로 마음의 평안을 얻었으니 말이다.


#4

이중적 감정, 남의 불행에서 오는 위안과 위로는 이처럼 타인의 불행에서 기반한다. 비약이 심한 예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열등감 내지는 우월감을 통해 남의 불행= 나의 행복으로 돌아오는 수순이라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들은 살면서 느끼는 여러 희로애락 속 시기와 질투, 욕심, 경쟁, 그들만의 끝이 없는 리그… 하지만 이 것들이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저 나의 상황에 대입해 보고 비교해 보는 사람의 습성이 상대적인 안도감과 우월감을 느끼는 일개의 감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우리는 살아가면서 남과 끊임없이 경쟁하며 남과 다른 삶을 비교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앞서 말한 시기심이다. 이때 내가 취해야 할 스탠스는 저 사람의 비교에서 오는 마음을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의 사기를 올릴 수 있는 전환점으로 삼는 것이다. 더불어 나보다 안 풀리고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이들을 보았을 때에는 힘든 상황을 잘 헤쳐나가길 응원하고, 그 일을 토대로 나도 이런 상황을 겪지 않게 반성하는 양분으로 삼는다면,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느끼며 나의 상황에 대해 안주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될 수 있을 것이다.

#5

가끔은 자신이 속한 어려운 상황에 위로하며 그래도 더 어려운 사정을 가진 사람보다는 낫다 라며 자위할 때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어려움이 그 어려움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일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도 이것에서 기반했다. 누군가는 나의 불우한 유년기, 절망과도 같았던 이혼 과정 등, 나의 불행을 통해 소외된 이들이 적는 글에서 같은 처지의 동질감을 느끼고 남이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에서 글은 시작되었다. 아이러니하지만 나의 불행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길, 나의 불행과 고통을 통해 같은 처지의 동질감을 느끼며 힘든 상황을 더 나은 상황으로 바뀌어 나갈 수 있게 되길 그게 내가 바라는 글이고, 그런 글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안녕하세요, 무무입니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시지요? 설을 기점으로 근래 글을 못 띄우게 된 요즘의 근황을 전합니다. 오른쪽 팔 근육 인대 파열로 반깁스를 하고 있어 답글을 다 드리지 못하였지만 항상 응원해 주시는 제 멘토와도 같은 청년 클레어 작가님, 부족한 글에 따뜻한 덧글을 남겨주셨던 꽃보다 예쁜 여자 작가님, 뮤뮤 작가님, 채수아 작가님, 소위 작가님, 소소 작가님 친히 적어주신 장문의 따뜻한 위로 말씀을 보고도 답글을 적지 못함에 죄송함을 표합니다. 그리고 공감해 주시고 언제나처럼 응원해 주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라는 공간에 오면 친정에 온 것처럼 마음이 굉장히 평안합니다. 그리고 힘이 들 땐 주옥과도 같았던 따뜻한 메시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며 작가님들의 위로와 힘이 되는 덧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곤 하는데요. 이렇게 귀한 분들을 만날 수 있게 해 준 브런치에 그리고 작가님들께 감사함을 표합니다. 새해에는 다들 건강하시고 모쪼록 행복한 일 가득한 2024년 되시길 기도합니다.

(신경 주사 버프로 통증이 많이 줄었습니다. 건강함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2월입니다!^^;)


사진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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