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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Mar 07. 2024

조건 없이 주는 사랑… 우리 깨때기 아줌마

추억으로 자리한 그 이름

깨때기 란 우리말로 깨와 때기(뙈기)가 더해져 작은 지역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수 화양면 용주리에 화교마을은 화양면의 유명한 마을의 이름이자 '깨때기'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데 여수 향일암이 있는 임포가 작은 개라는 뜻의 '깨개'와 작은 돌을 '깻돌'이라 하는 것과 같이 깨를 '작다'란 뜻으로 해서 깨때기는 작은 때기, 작은 지역이란 뜻으로 그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어렸을 적 이 '깨때기'라는 단어는 어감도 독특했지만 그 뜻을 알 수가 없어서 당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호기심이 발동했던 단어이기도 했는데 '깨가 많이 나는 마을'일까 하고 나는 유추해 볼 뿐이었다. 



#1


어렸을 적, 부모님의 이혼 후 아버지 친구분 집에 잠시 맡겨졌던 적이 있다. 그곳은 푸른 들판과 조용한 시골 마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을법한 곳이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 어느 곳에 눈길을 두어도 온통 푸르르고 생동감이 넘치는 따뜻한 시골 마을의 풍경. 그곳에서 나와 언니는 일주일간 신세를 지기로 했다. 아버지의 친구분은 동네 마을 이장님 같이 모자를 살짝 걸치듯 머리에 얹어 쓴 모습이었는데 몇 마디 체 나눠 보지 않아도 유쾌하고 정이 많으셨던 분이었다. 아주머니는 여느 아주머니들이 그렇듯 보글보글 하게 펌을 볶은 머리에 선한 인상과 푸근하게 웃는 미소가 정감이 가던 분이셨다. 


이들 부부는 아이가 없었는데 나와 언니가 집 안에 상주하게 되니 집이 살아있는 것 같다며 매일 웃게 해 줘 고맙다며 연신 기뻐하셨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맛있는 음식을 신경 써서 챙겨 주시고 우리 자매가 있는 동안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하시는 모습에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도 언제 그랬냐는 듯 경계심을 허물고 내 집인 양 편하게 지내게 되었다. 날개 없는 천사가 있다면 이들 부부를 놓고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무 대가도 없이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우리를 알뜰살뜰 보살펴 주셨다. 아저씨가 몰고 다니던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로 나가 난생처음 오락실에서 오락을 해보기도 하고, 밭에서 옥수수를 따고 수확 한 옥수수를 큰 솥단지에 삶아 내어 오손 도손 모여 앉아 옥수수를 맛있게 먹기도 했다. 깨때기 아주머니는 요리를 꽤 잘하는 편이셨는데 어떤 음식을 만드셔도 참 맛깔나게 잘 만드셔서 옆에서 바라보며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서 주방을 떠나지 않고 항상 옆에서 지켜보곤 했었다.



#2

여느 날은 깨때기 아주머니가 머리에 미용실에서 쓸법한 보자기를 쓰셨는데, 그때의 아주머니의 안색은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창백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줌마 어디가 아파요?" 묻자 깨때기 아줌마는 평소처럼 허허 웃으며 사람 좋은 웃음을 내보였다. "아냐. OO야, 아줌마는 네가 있는 시간이 참 행복하다." 의외의 대답에 나는 사뭇 부끄러워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때 아줌마가 내게 했던 말이 꽤 감동적이어서 어떤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몰라 몸을 베베 꼬기만 했었다. 


일주일이라는 약속된 시간이 끝나고, 여느 때처럼 깨때기 아주머니는 우리 자매에게 맛있는 밥상을 한가득 차려주셨다. 그리고 만남은 그날로 끝이 났다. 시간이 흘러, 나와 언니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깨때기 아주머니의 기억은 서서히 잊혀 갔다. 옥수수를 먹을 때면 이따금씩 아주머니 생각이 나긴 했는데, 우리 자매를 그렇게 예뻐해 주셨는데 왜 그날 이후로 연락 한번 없지 하며 생각해 보다가도, 이내 그런 생각들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3


학교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티브이 앞에 앉아 만화를 보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통화 내용이 평소보다 사뭇 어두워 보였다. 한숨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전화가 끊어질 때쯤 "누구예요?"하고 물으니 아버지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깨때기 아줌마의 부고였다. 이야기를 들은 직 후 하늘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분명 밭에 나가서 밭도 일구시고, 누구보다 더 부지런히 살림을 살뜰하게 해내셨던 분이었다. 나와 언니의 밥을 해 주시며 어떤 게 제일 맛있느냐며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말만 하라며 웃어 보이던 그녀였다. 아무 대가 없이 우리 자매를 그저 예뻐하고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신경 써 주시고 챙겨 주셨던 유일한 분이셨다. 


돌아가셨다니… 감당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우리가 혹시 그녀를 힘들게 한건 아니었을까, 불현듯 언니와 투닥대며 토라져서 방 안에 들어가 밥도 안 먹고 시위하듯 방을 체 나와보지도 않았던 철딱서니 없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죄송한 마음과 함께 이제 다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아리듯 아파왔다. 도망치듯 방 안에 들어가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 이제 깨때기 아줌마의 맛있는 밥은 먹을 수가 없다. 그녀가 솥단지에 장작불을 태워가며 쪄내던 옥수수는 다시는 맛볼 수 없다. 깨때기 아줌마의 밭을 일구는 모습과 요리를 하며 흥얼거리던 찬송가는 이제 다시 들을 수가 없다. 마음이 북받쳤다. 그녀의 죽음은 믿기 어려웠고, 모두 내 탓인 것 마냥 죄송스럽고 슬프기만 했다. 


깨때기 아줌마의 밥은 정말 맛있었다고, 연락도 못 드리고, 잘 지내고 계시는지 안부 한번 묻지 못했던 것 정말 죄송했다고, 보고 싶었다고, 그리웠다고, 아주머니는 늘 그랬듯 잘 지내고 계시는 줄로만 알았다고. 전할 수 없는 말은 목구멍까지 솟구쳐 올랐지만 뱉어내지 못하고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는 일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이내 아픈 기억을 묻어 버리듯 그녀의 기억을 마음 깊은 곳에 덮어버렸다. 다시는 아픔이 올라오지 않게, 그리고 그녀의 기억에 슬픔에 잠식되지 않게, 그렇게 기억을 억눌러버렸다. 



#4

고작 여섯 살 밖에 안되었던 나이의 기억이지만, 그 시절 그때, 깨때기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해 주셨던 맛있는 밥과 조건 없이 베푸셨던 사랑은 아직도 나의 머릿속에는 좋은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화양면 하면 깨때기! 하고 말이 바로 튀어나올 정도로, 그 작은 마을 작은 고향에서의 추억은 내가 살아가면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고마웠던 추억이자, 행복했던 때의 기억이다. 그때의 기억 속 깨때기 아주머니가 아직 건강히 살아계셨다면, 그때 정말 감사했었다고, 항상 부끄럽고 숫기가 없어 말하지 못했지만 아주머니가 해준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이었었다고, 정말 감사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제는 깨때기 아주머니에게 이 말은 전할 수가 없다. 그냥 생각이 떠오르면 기도하듯 읊조리며 깨때기 아주머니의 안부와 그곳에서는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시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천사였기에 빨리 천국에 올라간 게 아니었을까. 




여러분의 주변에도 고마운 은사님이 계신가요?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며,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이가 있나요?


사진출처 <Pinterest>



안녕하세요, 무무입니다. 요즘 근황을 전해 봅니다. 오른쪽 팔을 최대한으로 아끼고 쓰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한 손으로는 당장 집안일도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통에 제대로 붕대를 채우지 않고 생활했습니다. 그러니 생각보다 통증이 오래가더라고요. 이 전에도 눈 길에 엎어져 인대가 늘어나 깁스한 후 하루도 안되어 깁스를 풀었었는데 또 비슷한 상황, 같은 부위를 다쳐서 병원에 가니, 의사 선생님께서 왜 이렇게 오른쪽 팔이 수난을 겪냐 하더라고요. 이어 "남편 분께 도움 좀 받으시고, 팔을 가능하면 쓰지 마세요." 하시는데 헛헛한 웃음만 지어 보이며 돌아왔답니다. 많이 쉰 만큼 이제 배로 달려야겠네요. 답글을 다 적지 못했지만 이전 글에 제 안부를 걱정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하고 또,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는 말씀 전합니다. 회복할 수 있게 응원해 주셔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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