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생활보호대상자, 한부모가족이 살아가는 법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집은 기초 생활보호 대상자이자 한부모 가족이었다. 기초생활보호자란 국가가 생계, 의료, 주거, 교육 등 기본적인 생활권을 보장하며 자활을 돕기 위한 사회보장제도다. 이 기초 생활보호 대상자는 소득과 재산이 중위소득의 32~50% 이하여야 하며,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어야 선정될 수 있다.
아빠와 우리 자매, 3인 가족은 기초생활보호 대상자로 의료, 주거, 교육 급여 등을 나라에서 지원받으며 생활했다. 기초 생활보호대상자, 기초생활 수급자로 불리는 위의 대상자는 나라에서 정하는 소득의 수준에 못 미치는 범위 안에서 선정이 되며 학생의 입학비, 수업료, 학용품비, 우유대금을 지원하며 질병, 부상등에 대한 의료 서비스(진찰, 치료)등을 몇 백 원, 몇 천 원만 내도 치료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또한 거주하는 주거지 역시 나라에서 정하는 LH 아파트에서 거주할 수 있게 하여 낮은 보증금과 임차료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며 생계에 못 미치는 정도의 상태에 있다면 긴급 생계비를 통해 지원을 해 주기도 하는 고마운 제도이기도 하다.
#1
기초 수급자, 생활보호대상자로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도합 12년의 혜택을 받고 살아온 이로,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저소득층에 대한 배려는 어렸을 적 내가 감당하기에 부담스러운 제도 이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건대 그 제도가 없었다면 우린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겠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우유급식, 체험활동 학습비, 교육비 지원, 결식아동을 위한 도시락 배달, 싼값에 살 수 있었던 정부미(쌀), 병원 진찰, 약국비(500원~1,000원), LH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인식, 자활을 하며 수입원을 얻는 형태 등의 지원은 내게 숨기고만 싶은 나라의 혜택이기도 했다.
'숨기고 싶다'는 표현이 누군가에게는 '복에 겨운 일'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복지와 30여 년 전의 복지를 지원해 주는 형태는 꽤나 달랐다. 2000년 전에는 기초생활수급자가 기초생활보호대상자란 용어로 사용되곤 했었는데 이때의 배경에는 IMF 때 대량 실직등 국가적 위기가 발생하고 기존의 생활보호법이 시행되어 복지의 사각지대 없이 모두가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지원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이 용어에 해당된다 하면 '못 사는 집', '가난한 집'이란 인식이기도 했다.
우유 급식을 위한 저소득층의 안내문은 학생이었던 내가 선생님께로 불려 나가 직접 받거나 아이들이 지원 신청서를 가정에서 써오고 유인물을 걷어 낼 때도 낼 것이 없어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며 선생님의 입에서 내 이름이 호명되지 않기만을 바라기도 하던 일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체험활동 학습비와 교육비 지원 역시도 기초 생활보호대상자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았던 신학기 때에는 교무실로 불려 가 교육비와 체험활동 학습비에 대한 설명을 따로 듣고, 부모님께 전달해야 했는데 이런 고충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고 내게는 그런 일들이 하나 둘 쌓여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어떤 날은 교무실에서 나와 선생님의 대화를 엿들은 친구가 이 일을 친구들에게 전해 나의 가난이 일파만파 알려지기도 했고 남들보다 불우하고 못 사는 집이라는 프레임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어 항상 나를 따라다니는 꼬리표와 같았다.
#2
초등학교 생활을 떠올려 보자면 일어나서 아무렇게나 뒤섞인 장롱 옷장 속에서 입을 수 있을만한 옷을 찾다 이내 찾지 못하고 베란다에 널어져 있는 옷가지와 양말을 걷어입는 형태로 시작을 했다. 아침을 챙겨줄 이가 없으니 빈 속에 어수선한 행색을 하고 책가방을 지고 나가 학교를 가고, 수업의 준비물은 항상 챙겨가질 않았으니 먼발치에서 친구들이 재료를 이용해서 만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거나, 담임 선생님이 챙겨주시는 준비물로 하여금 학급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용돈이라곤 받아본 적이 없는 일례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학교 친구들이 문방구에 들러 이것저것 사 먹고, 학용품, 장난감 등을 사고 봉지를 들고나가는 모습은 부럽기만 했는데 돈이 없는 나로서는 문방구에서 파는 컵 떡볶이, 떡꼬치, 아폴로 외 불량식품등은 그림의 떡이기만 했었다.
이후 집에 들어서면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티브이나 멀뚱히 바라보고 혼자서 인형놀이를 하며 노는 것이 나의 전부였었는데, 가끔 언니가 끓여줬던 라면이 우리의 유일한 주식이자 부식이었다. 가스 불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내게 라면은 정말 맛있는 음식이었고 김치 하나 없이 라면을 먹는 날들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집밥이 간절해지기도 했다.
#3
처음에는 막노동을 전전하며 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훗날 아이들의 학원차 운행을 하며 일을 하셨었는데 그마저도 일이 없게 되면 자활을 하며 생계를 꾸려 가셨다. 그리고 그런 날이 지속되면 될수록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 집사님들과 친분을 맺고, 교회 봉사를 지원함으로써 먹을거리를 집사님들께 얻어오곤 하셨다. 가령 묵은지나 라면 상자, 과일 또는 반찬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이때 우리 집의 냉장고는 이미 포화상태를 이루기도 했었는데 어느 것이 먹어야 되는 것인지, 어떤 것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는 눈으로 가늠할 수가 없어 꺼내 먹고 배탈이 났던 적이 꽤나 있었다. 아버지는 냉장고를 썩지 않는 원천 같은 것으로 생각하셨던지 받아오는 음식물들은 항상 냉장고에 적재하셨고, 이마저도 냉장 기한이 길어지면 다시 검은 봉투에 싸서 냉동실로 옮기는 절차를 밟았기에 제대로 된 음식, 상하지 않은 음식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았었다.
그중 동그란 원형틀에 들어 있는 5칸 원형 반찬 도시락은 결식아동을 위해 주민센터에서 지원해 주는 도시락 산업이었었는데 분홍 소시지 햄, 김치, 콩자반, 콩나물 무침, 무 김치, 멸치, 어묵볶음, 3분 카레, 햇반, 요구르트는 냉장고에 켜켜이 쌓여 있어 어떤 것을 골라 먹어야 하는지 난제이기도 했다.
#4
지원해 주는 반찬들은 결식아동을 위한 반찬이라고 하기엔 항상 같은 느낌의 반찬들이 대게였는데 앞서 말한 다섯가지의 반찬들에서 1,2가지가 바뀌거나 3분 카레에서 3분 짜장 또는 어쩌다 한번 나오는 특식 3분 미트볼이였다. 물릴 만큼 물릴 대로 항상 같은 반찬들을 먹고, 그마저도 먹지 않아서 냉장고에서 며칠을 상주하며 차가워져 말라비틀어진 분홍 소시지 햄을 먹으며 상했나 안상했나를 킁킁 거리며 살피고 밥을 먹는 일. 방학때면 오는 이 반찬들은 빨간색 뚜껑의 플라스틱 통에 담겨 보자기가 묶여져 집 앞에 매일 같이 배달이 됐었는데 더운 여름 날이면 살짝 쉰 것 같은 냄새가 날 때도 있었고, 배달하며 쏠린 탓에 김치 국물이 반찬 여기 저기에 섞여 김치의 시큼한 맛이 나는 반찬을 먹어야 할 때도 있었다.
어떤 이는 그것 역시 감지덕지라고 얘기할 수 있겠고, 또 나와 같이 자라온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이마저도 감사'라는 마음 보단, 상하고 곰팡이가 피어져 버려지는 반찬 통이 야속하기만 했다.
상한 반찬들을 한 번이라도 먹게 되는 날이면 다시 그 음식을 먹기가 주저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반찬들이 또다시 나오는 무한의 반복, 기초 생활수급자의 반찬은 찢어지게 가난한, 지겹도록 가난한,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의 굴레와도 같았다.
#5
기초 생활보호 대상자, 기초 생활 수급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나라의 지원을 받게 되는 경우와 자발적으로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길 자처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기초 생활 보호 대상자가 되었다. 어쩌면 우리 자매들을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고, 조금이라도 더 먹이기 위한 선택이었을까. 객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건대, 나의 아버지는 현실의 상황에 대한 인정 보단 원망이 많은 분이셨다. 그리고 마음의 병이 몸으로 번져 우울과 불면으로 매일을 피곤해하셨고, '먹고살기 힘들다, 돈이 없다'는 말을 늘 입버릇처럼 되뇌던 분이셨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라는 표현보단, 자발적 생활 보호 대상자와 가깝다.
또, 나라에서 주는 복지로 하여금 한시름 놓았다는 편이 오히려 맞았다. 아버지는 일하는 벌이 보단 자활, 저소득의 기준에 미치는 급여를 받는 일을 택함으로써 교육비와 의료비를 덜 내는 방법을 택하셨고, 그것이 본인의 근로보단 훨씬 안정적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6
자발적 생활보호 대상자, 기초 생활수급자, 한부모가족. 우리 가족은 위의 형태에서 또다시 발전해 다문화 가정으로 진화했다. 발전이 아니라 더없이 사는 형태로의 발전, 누구나가 우리가 사는 집의 형태를 알 수 있을만한 국제결혼, 재혼의 상황은 나의 유년기를 더욱 불우하게 만들게 된 요인 중의 하나였다. 아버지의 마음이 납득은 가지만, 아버지의 인생이 중요했음을, 아버지의 안정과 가정이 중요했음을 알게 될 때쯤, 나의 이복동생은 태어났고 이때부터 나는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으리란 다짐을 하곤 했다.
초, 중, 고 전교 1등을 항상 거머쥐었던 똑똑하고 공부에 욕심이 많았던 나의 언니는 대학교 등록금 몇 백이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한 체 서울로 상경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립을 하게 되었다. 언니의 대학교 포기는 내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누구나가 언니의 대학교 진학에 궁금해했었다. 워낙 공부를 잘하기도 했거니와 본인의 미래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던 언니는 대학 등록금 몇 백만 원도 없는 가난한 집의 장녀로, 결국 가고 싶었던 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했다. 1 지망, 2 지망 써 내려갔던 언니의 꿈은 아버지의 대학 진학 만류로 인해 끝이 났고, 그날 언니는 많이 울었다. 그리고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체념한 체 본인의 친구와 함께 살던 자취방으로 홀연히 돌아갔던 게 아직도 생각이 난다. 이후 나 역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대기업의 생산직에 취업을 했다. 누군가에게 대학교는 선택 사항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나라의 지원이 되는 교육 안에서의 선택이 다였다.
#7
기초 생활 수급자, 생활보호 대상자. 생활을 보호받고 관리해 주어야 하고, 복지의 처우에 있어 생활환경이 달라지는 수급자의 삶은, 더욱 악착같이 살아내지 못했던 아버지의 과오일까. 아니면 두 딸을 키우며 고단했던 아버지의 선택적 가난이었을까. 어떤 이는 가난은 부모님의 세대에서 자식의 세대까지 물려주는 일환이라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가난은 자식의 세대에서 끊고 나갈 수 있는 사슬 같은 거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활 보호대상자의 일상에 익숙해지고 그 삶에 안주하게 된 자는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복지를 놓지 못한다. 이어 자식들에게도 미래 직업에 대한 중요성,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 알려주지 못한다.
이는 경제적인 부분의 어려움을 이미 본인이 수십여 년을 거쳐 익숙해졌고, 자식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없는 예이기도 하다. 해서 근래 아이들에게 경제적인 관념과 지식을 심어주기 위해 어려서부터 가르쳐 주는 부모들도 많다고 한다. 자식은 본인처럼 아등바등 지내지 않길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8
가난의 굴레, 아버지의 선택적 가난, 가난의 유산…
가난한 사람들은 음식을 대할 때에도, 물건을 대할 때에도, 대인 관계를 맺을 때에도, 다치거나 아플 때에도, 학업을 위해 공부가 필요할 때에도 심사숙고해 결정하곤 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 많아지고, 이 불편함이 주는 마음과 불안정한 생활은 사람의 마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든다. 비단 경제적인 물질 부분에서만 가난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마음까지도 가난해지고 옹졸해지고, 마음 그릇 역시 작아진다는 소리다.
나는 가난한 집에서 자랐고, 가난함이 어떤 것인지 절절하게 느끼며 커왔다. 그래서 아버지와 다른 형태로 소비하고 싶었고, 아이들이 원할 때에 필요한 공부를 가르칠 수 있게 하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항상 감사 인사를 전하며 허리를 숙여야 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수급자의 삶을 내 대에서 끊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을 유산으로 물려주게 된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처럼 평생을 가난한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세금을 내고, 정당하게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그렇게 남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듯 일반적인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9
가난에 안주하고, 가난에 안일해지면 누군가가 내게 도와줄 것이 있는지 주민센터에 들어가 묻는 일을 자행하고, 누군가가 내게 무언갈 주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무엇인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에 혈안이 된다는 소리다. 주민센터에 가면 분명 저소득 가구의 일원으로 혜택을 받고자 온 사람들일 테지만 그중에서도 선택적 가난으로 생활보호대상자가 된 이는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만을 찾는다. 그리고 그 혜택을 받지 못함에 분개하는 모습이 분노로 표출되는 상황 또한 종종 연출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기초 수급자, 생활보호 대상자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최선일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일자리가 많아지고, 근로 능력을 갖출 수 있게 각각의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기관들이 많아지고, 꼭 물질로 채워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 수급자 스스로 독립된 형태로 잘 살아갈 수 있게 밑천을 키워 주는 것이 복지가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든다.
생활보호 대상자로 살아온 부모님 밑에 커서 수급자의 인생이 녹록지만은 않기에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남들이 내는 세금을 우리가 돌려받고 생활에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자립을 지체하게 할뿐더러 한평생 수급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누구나 가난하지 않았으면 한다. 가난한 인생을 전반에 살아왔을지언정 후반부에는 역전을 할 수 있는 형태가 되길 바랄 뿐이다.
#10
소비를 줄인다. 지출을 통제한다. 예산을 정하고 수입원을 가능한 늘린다. 이 것이 외벌이로, 한부모 가정으로 살아가는 나의 모토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안주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 밖까지 나의 능력이 뻗어나갈 수 있게 나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올바른 경제관념을 가진 부모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거북이 같은 행보지만 그렇게 꾸준히 천천히 진득하게 포기하지 않고 인생을 가난하지 않게 잘 살아가고 싶다. 그렇다면 나중에는 내가 원하는 인생, 내가 원하는 목표에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좋았던 기억보단 나빴던 기억이 더 지배적이었습니다. 혼자 일어나 학교를 가고 혼자 귀가해 차가운 반찬을 꺼내 먹고 혼자 집에서 티브이를 보다 혼자 잠을 청하는 일. 한부모 가족, 생활보호 대상자로 살아가는 삶은 제게 있어 팍팍한 삶이었기만 했었는데요. 지금도 라면은 즐겨 먹지 않고, 분홍 소시지 햄은 절대 손도 대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란, 저녁 시간 가족들과 둘러앉아 맛있는 된장찌개에 계란 프라이를 척척 비벼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서로 늘어놓고 깔깔대며 웃어 보이는 일.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기도 했답니다. 어린 시절이라고 서두를 열지만, 글을 쓰며 매번 놀라운 것이 불과 엊그제의 일처럼 회상이 되고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7살 때의 기억이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 미화되거나 왜곡되진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현재를 살아가는 기억 보단 유년기 때의 기억이 오히려 또렷해져 가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기억의 저장 공간이 넘치고 후의 기억들이 되려 건망증처럼 쉽사리 잊히는 것은 아닌지 싶을 정도기도 합니다. 기억을 덮기보단 이후의 기억들이 되려 쌓이지 않고 소실되는 느낌이랄까요.
저희 아버지는 우리 자매가 성년이 되고서야 생활보호대상자에서 벗어나셨습니다. 부양자가 있기에 생활을 보장받는 사람에서 일반 보통의 사람이 되셨지요. 어쩌면 그 생활보호대상자의 기준, 틀에 맞게 살기 위해 아버지는 여러 기회를 놓치시기도 하셨고, 또 받는 것에 익숙하게 살아가기도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이해가 되는 것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할지언정 아버지가 저희 자매를 키우기 위해 하신 선택이기 때문에 비난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열심히 치열하게 사셨다면 우리는 그때 조금이나마 시작점이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건 그런 상황에서도 저희 자매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아버지의 선 안에서 무던히 노력을 하셨고, 그렇기에 저희가 잘 성장해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겪었던 불우했던 가정, 이혼 앞에 무력했던 저의 이야기, 이후 성장하고 또다시 이혼을 감행했던 저의 이야기를 적어내고 있습니다. 글을 쓰며 아픔을 꺼내어 치유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은 작업이기도 합니다. 숨기고 싶었던 내면의 아이를 소환해 그때의 상처를 다독여 주는 일은 쉽지만은 않지만 그 역시 나의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치유하는 과정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또, 제 글로 하여금 상처를 위로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날 것을 적어내기도 합니다. 어떤 작가님께서는 이런 아픔 역시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극복하기보단 지금의 현 상태에도 만족하는 삶, 즉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잘 살고, 유년기의 불행이 있었을지언정 성인이 되어서는 그 일에 좌지우지하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음을 이야기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맞습니다. 상처라고 생각되는 이전의 기억들을 회복시키는 일과 그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지금의 나로서도 받아들이는 일. 누군가에게는 책 속에 책갈피를 꽂아 놓고 책장에 넣어 두는 일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 일을 복기하며 아팠던 상처를 다시 위로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합니다.
정답은 없지만, 다만 분명한 건 자신에게 맞는 치유와 인정으로 그때의 아픔에서 허우적거리고 내 삶을 피폐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목욕탕에서 아주머니들이 여럿이 모여 앉아 막장 드라마를 보며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난 더한 것도 겪었어, 내 얘기하면 막장 드라마 몇 편은 나올 거야~"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 그 안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때론 흔들리고 주저앉기도 하며 삶을 지속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점을 기억하시고 힘든 상황에서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구절을 기억하시며 잘 이겨 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