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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인선 Moon In Sun Mar 13. 2024

스프링클러 오작동처럼 예측 불가한 (육아) 인생

마흔에 쓰는 육아일기

좋아하는 짹짹이(갈매기)와 배, 두 개를 한 번에 만나서 매우 신났던 지난 달 2월의 마지막 날.





일요일 어젯밤 아홉 시에는 손님으로부터 갑자기 전화를 받았어요. 스프링클러가 터져서 복도 전체가 물난리가 났다고 얼른 와봐야겠다고요. 아기 목욕물을 받다 말고 얼른 가보니, 다른 집에서 스프링클러를 잘못 건드려 물이 터졌는데, 관리실에서 물을 잠글 수 있는 직원이 없다고 한 시간째 물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더라고요. 


엘리베이터 3개 중 두 개는 먹통. 불안한 손님께 비용을 환불해 드리고, 새로 묵을 수 곳을 잡아드리고, 짐을 내려 드리고, 고개 숙여 여러 번 사과를 하고 나니 밤 열한 시가 되었더라고요. 남편 씻고, 아기 씻기고, 저 씻고 나니 밤 12시. 남편은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고, 아기도 품 안에서 바로 쌔근쌔근 잠이 들었네요.


스프링클러 오작동.


이건 벌써 저와 남편의 인생에 두 번째 있는 일이에요. 코로나도 터지기 전인 예전에 소방점검이라 물 호스를 열었는데, 스프링클러가 고장이 났던 우리 집에만 물이 쏟아졌더라고요. 침대, 가구가 온통 물에 범벅이 되어 홍수가 되었고, 임차인에게 물어줘야 하는 배상비가 7백여만 원. 


관리실에서는 자기네 귀책이 아니다, 소방점검 회사도 우리 책임이 아니다, 동대표위원들은 나 몰라라, 관리소에 전화하고 소방서에도 전화하고, 보험회사에도 전화하며 배상받으려고 애쓰던 머리 아픈 시간이 있었어요. 죽어도 못 준다는 돈을 절반쯤은 결국 받아냈고요.


작년 여름에는 오수관이 파손되며 쏟아진 일도 있었고, 겨울에 수도관이 동파되는 일은 여러 번 있었고요. 한 겨울의 수도관 동파는 조금 더 머리가 아파요. 한파가 우리 집만이 아니라 온 동네의 구축 집을 찾아 덮치기에, 수리 기사님을 섭외하는 일이 매우 어렵거든요. 헤어드라이어, 뜨거운 물, 이것저것 다 해봤자 소용이 없는 경우도 많고요. 어렵사리 섭외한 수리 기사님의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죠. 우리 집에 와주셔서 만난 게 다행인 상황인걸요.


어제 오랜만에 조우한 ‘스프링클러 오작동’은 주말 저녁에 잠시 저의 동공을 흔들리게 했지만, 남편과 저는 벌써 여러차례 이런 상황을 겪어 왔잖아요. 


타격감이 조금 적어졌달까요.


타격감. 제가 남편과 함께 일을 시작하며 우스갯소리로 자주 쓰는 말이예요. 저는 예기치 못한 일이나 상황을 굉장히 싫어하고, 맞닥뜨리면 어쩔 줄 몰라서 스트레스가 꽤 높아지는 사람이었거든요. 오늘의 일이 내가 예상한 범위 내에 있어야 하고, ‘To do list’의 오늘 할 일이 싹 밑줄이 그어지며 80% 이상 처리되었을 때 희열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었는데요. 


더 이상 인생이 그렇게 잘 안되더라고요. 남편과 자영업을 하면서도 예기치 못한 상황과 사람이 너무 자주 나타났고요. 


아이를 낳고는 정말 더더욱 그런 상황이 되었죠. 아이의 존재 하나 때문에 엄마의 하루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걸요. 아이의 콧물, 기침, 39도가 넘어가는 고열, 토, 설사. 평소와 다른 아이의 상태만으로도 엄마의 하루는 온통 흔들려요. 


아이가 아파서 오늘 하려던 일을 놓치고 아무것도 못하고 아이 옆에 딱 붙어 있어도 이제는 마음속으로 화가 나지 않아요. 예전에는 그런 순간들이 모두 좀 답답했거든요. 아이 때문에 오늘 하루가 사라지듯이 제 인생이 다 사라져 버릴까 봐요. 


육아 3년 차. 이제는 아니죠. 


오늘은 이럴 수 있다, 아이가 났는 게 당연히 우선이고, 오늘은 아이를 살뜰히 보살피면 된다, 오늘 하려던 것들은 내일 또는 모레 해도 괜찮다, 급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급하지 않게 되는 것, 오늘 꼭 하고 싶었던 일들을 오늘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내려놓는 마음 같은 것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점점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한 타격감이 적어졌어요. 덜 아프고, 덜 당황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해결해 나가면서 방법도 수월해지고, 멘탈도 덜 흔들리고요.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고 갑작스러운 연락도 없는 하루. 

아이는 아프지 않고 제때에 어린이집에 가서 잘 놀고, 돌아와 잘 먹고, 함께 잠드는 하루. 


이십 대에는 그토록 지루하게 느껴졌던 반복되는 이 일상들이 사십 대의 저에게는 편안하고 안정감을 주네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하리만치 고요한 일상이 주는 안정감에 문득 감사한 마음이 드는 그런 하루입니다.






23개월 아기와 함께 책을 읽는 일상.

읽다 보면, 쓰다 보면, 점점 좋아질 것이라 믿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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