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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Aug 11. 2019

9일: 두통에는 브런치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선을 넘었을 때

결국

오늘 영어수업 약속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11시였다. 10시 55분에 카톡이 왔다. 진키는 지금 병원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시간에 맞춰 올 수가 없으니 빨라야 12시 이후가 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바로 문자를 보냈다. '병원이라니 큰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괜히 서두르지 말고 수업은 오후 1시나 2시쯤이 좋겠다'라고, 그리고 '진키 네가 편한 시간을 정해주면 그때 수업을 시작하자'라고 전했다. 이것 또한 나에게는 늘 반복되는 일 중의 하나다. 수업시간은 언제나 진키가 정하도록 했다. 우리는 영어 과외수업을 제외하고는 다른 일정이 없으므로 과외교사의 시간에 맞추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진키가 수업시간을 정하면 예외 없이 그 시간에서 반드시 30분~1시간씩 늦었다.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피곤한 얼굴로 나타난 진키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심각한 것은 아니고 선천적으로 폐에 문제가 있는데 최근에 다시 안 좋아져서 약을 처방받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와 진키는 바로  3시간의 영어 수업을 시작했다.


사실, 아이가 사람들과 영어로 간단한 인사 한마디 하는 것조차도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수업은 '말하기'에 초점을 맞춰줬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진키에게 부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두 사람의 대화 소리는 줄어들고 대부분의 수업시간 동안 아이는 진키의 노트북에 있는 문장들을 받아 적었다. 알파벳 쓰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은 아이는 그림을 그리듯이 문장들을 긴 시간 동안 적기만 했다. 그리고 아이가 적은 문장을 한 번씩 함께 읽고 다시 새로운 받아 적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유튜브에서 적당한 영어 애니메이션 영상을 찾아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슈베르트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던 이들의 대화 소리는 점점 더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진키는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시험 준비를 위한 과외를 해왔다. 그래서 자유로운 방식의 수업보다는 체계적인 (교재 중심의) 수업방식을 선호한다고 생각해왔던 터였다. 그리고 나 또한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보니 다른 선생님의 교수법에 간섭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말을 아끼고 아끼던 참이었다.


갑자기 칙, 칙, 칙, 소리와 함께 달큼한 향수 냄새가 진동한다. 무슨 일이지? 고개를 돌리면 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수업에 방해될까 봐 시선을 노트북에 고정시킨 채 반쯤 뚫린 가벽 뒤가 훤히 잘 보임에도 불구하고 애써 그쪽 방향을 쳐다보지 않았다. 잠시 후 수업을 끝내고 나온 진키는 아까 병원을 다녀온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 사이 완벽하게 화장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붉은 입술과 핑크 빛 볼, 짙어진 속눈썹과 또렷해진 눈매... 미처 감추지 못한 나의 놀란 표정에 진키는 살짝 웃어 보이며 오늘 오후에 약속이 있다면서 총총걸음으로 문 밖을 나섰다.

 

요동치는 나의 마음


두통에는 브런치

아이들에게 질문을 할 때에는 특히 유의해야 한다. 어른들은 질문 안에 이미 자신들의 의도를 심어놓고 아이에게 솔직하게 대답해달라며 앞뒤 상황이 맞지 않는 딜레마에 아이들을 내몰기도 한다. 이미 답은 정해진 거 같은데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니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들은 난감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질문을 아이에게 처음으로 물었다. '수업시간에 받아 적기를 아주 오래 하는 거 같던데, 네가 받아 적기를 하는 동안에 선생님은 주로 무엇을 하고 계시니?' 선생님은 그 사이 계속 문자를 주고받거나 핸드폰을 한참 들여다보고 계신다고 아이는 답했다. 오늘은 계속 거울을 보며 무엇인가를 하셨다고 했다.


아이의 답에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두통이다. 다시 혼란했던 원점으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진키 때문에 숙소를 이 레지던스로 정했고, 이 주변에는 마땅한 어학원이나 교육 관련 인프라가 전혀 없는 거주지역이다. 결국 진키가 아니면 별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 나의 소원은 그저 그녀와 함께 무탈하게 한 달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바람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난 뒤 아이는 하루를 일과를 잘 마쳤으니 그 보상으로 잠시만 게임을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혼자 노는 아이를 옆에 두고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닥으로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지금 내 옆에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성인 한 명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라도 좋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 상황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가끔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신고민을 털어놓다가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해답을 찾기도 하지 않는가. 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잠시 후 나는 노트북을 열고 브런치에 로그인했다. 가입만 해놓고 방문조차 하지 않았던 나의 계정은 이미 오래전에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에 홀린 것처럼 글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절박했던 내가 찾아낸 치유의 길이기도 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그리고 두통에는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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