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면성의 끝에서 새로움이 움트다

영화 <조커>

by 최종호

인간에게 양면성은 숙명과도 같다. ‘나 다운 나’ 혹은 ‘나 답지 않은 나’를 교차하며, ‘나’를 찾아간다. 때문에 인생의 터널을 지나며 ‘진짜 나’를 알아가고, 만들어가는 데 양가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이유와 명분은 중요한 ‘당위성’을 도출한다. 저마다 처한 환경에 따라 페르소나를 방어기제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본연의 ‘나’일 수 있다.

영화 <조커>는 이러한 인간의 난행에 물음표를 던졌다. 한 인간의 양면성을 처연하게 묘사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양면성을 짚었다. 개개인이 지닌 양면성에는 원인이 있고, 이유가 따른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양면성이 사회적 용인에 타당한 것인지를 묻고 있다. <프라이멀 피어>의 애런(에드워드 노튼)과 <23아이덴티티>의 데니스(제임스 멕어보이)의 다중인격과는 다른, 사회병리에 초점 했다. 그래서인지 조커의 양면성에는 ‘사람이니까, 나약한 인간이니까’라는 이해가 스멀거린다. 그 속에는 아동학대와 결핍, 소외계층, 사회통념에서 바라보는 편견 등이 거머리처럼 붙어 있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조커의 ‘웃는 병’은 이러한 세상에서 근근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을 자조하는 슬픔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난 일을 복기하고, 후회를 반복하는 현대인들의 다른 형태로 해석할 수 있다.

<조커>의 아서 플랙(호아킨 피닉스)은 그동안 봐왔던 ‘조커’와는 결이 다르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뻔한 악당이 아닌, 우리 주변의 ‘누구’인 것이다. 사회병리현상이 낳은 희생양으로서 에픽테토스의 내적 자존감이 파괴된 흔한 사람이다. 뼛속까지 악할 것 같은 그동안의 단면적인 조커가 아닌 인간이 조커가 될 수 있는 본질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지닌 양면성의 결과가 더 참혹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movie.daum.net

지금까지 악에 집중된 조커를 보면, 1990년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에서 잭 니콜슨은 그로테스크한 모습과 연기를 선보여 당시 ‘최고의 악역’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말 그대로 ‘악(惡)’에만 집중된 인물이었다. 1960년대 조커의 시작을 알린 시저 로메로가 조커의 캐릭터화에 성공했다면, 잭 니콜슨은 조커를 악당의 반열에 등극시킨 공신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 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니 말이다. 하지만 2008년 <배트맨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의 등장은 영화계에 충격을 주었다. 악당이 아닌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악마’적인 조커의 탄생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마치 악마를 의인화시킨 듯 히스 레저의 조커는 영화 프레임을 꽉 채우며, 배트맨을 압도하기까지 했던 것.

그동안 조커를 악당, 악마적인 아이콘으로서 극악함을 표현했다면, <조커>의 아서 플랙은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과 이유를 설명한다. 연약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조커를 웃음과 몸짓, 망상으로 이야기한다, 조커가 지닌 삶의 무게와 아픔,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삶에 대한 상실감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지가 영화 전체에 흐른다.

이미지 출처: movie.daum.net

토마스 웨인에 대한 아서의 어머니 페니 플랙의 사랑이 조현병에서 비롯됨과 아서의 사랑이 망상의 결과라는 것은, 그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씌우는 사회환경적 잔인함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잔혹한 건 이러한 삶의 형태가 실제적인 ‘논픽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커를 짓누르는 혹독한 현실이 그를, 한 인간을, 나아가 특정 부류를 훗날 악마적 양면성을 발현하는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지 모른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조커>의 아서 플랙 환경이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의 조(호아킨 피닉스)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아동학대의 피해로 인해 피폐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은 우연이 아닌 보편적인 사회 고발과도 같다. 두 영화의 주인공으로 열연한 호아킨 피닉스가 조커와 살인청부업자로서가 아닌, 상처받는 것에 지친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간절함을 스크린 밖으로 절규하는 듯하다. 두 영화의 줄기가 같은 것도 이처럼 인간의 연약하지만 잔혹한 양면성을 이야기하는 데에 있다.

이미지 출처: movie.daum.net

<조커>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끝에서의 시작’처럼 인간의 양면성에서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했을 때 표출될 수 있는 분노의 정점일까? 그런 분노에 동요되는 우리에게 국가가 사회가 취해야 할 몫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안에 스멀스멀 커지고 있는 조커와 조우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한 ‘무엇’을 말이다.

“나쁜 사람은 없다, 단지 나쁜 상황이 있을 뿐”이라는 <신과 함께: 인과 연> 속 대사가 되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