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행동에 변화를 준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이다. 현대인들이 행복을 느낄 때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 직업을 구했을 때, 주위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일 때, 돈을 많이 벌었을 때,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할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날 때 등에 있다. 서로 다른 경험에서 오는 생각을 풀어놓고 공감하면 행복한 마음을 얻는다. 우리의 행복은 서로 공감만 해도 얻어지고, 슬픈 일은 나누기만 해도 위로가 된다.
소통을 잘하려면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상대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에 따라 삶이 풍요로워질 수도 있고 힘들어질 수도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않고는 살기 힘들고, 자기중심적으로 남을 판단하면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소통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서로에게 힘을 준다.
‘닭과 오리의 소통 능력은 누가 더 좋을까?’라는 질문에 오리보다 닭이 사람과 소통을 잘한다는 재미있는 대답이 있다. 오리는 알을 낳고 방치하며 자리를 뜨는 습성을 갖고 있지만, 닭은 알을 낳고 “꼬끼오!”하고 소리치기 때문이다.
한 소녀가 산길을 가다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대는 것을 보았다. 소녀는 가시덤불을 제치고 들어가 거미줄에 걸려 있는 나비를 구해주었다. 나비는 춤을 추듯 훨훨 날아갔지만,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찔려 피가 났다. 그때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천사로 변신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왔다. 천사는 자기를 구해준 은혜에 감사하며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만 들어주겠다고 했다. 소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천사는 소녀의 귀에 소곤거리고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소녀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결혼하여 엄마도 되고, 할머니가 되도록 늘 행복하게 살았다. 그녀 곁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행복하게 살았다. 세월이 흘러 소녀가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임종을 눈앞에 두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다. 할머니는 웃으시며 입을 열었다. 내가 소녀였을 때, 나비 천사를 구해준 적이 있지, 그 대가로 천사는 나를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었지. 그때 천사가 내 귀에 대고 소원을 들어준다며 말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감사하다고 말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평생 행복하게 될 것이요."
그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다. 그 결과 모든 일이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사람은 원래 자연의 일부지만 그 속에서 독립하려고 발버둥을 치며, 때로는 자연과 대립각을 세운다. 마음이 아플 때면 아무 생각을 하지 말고 꽃가루를 묻히고 날아오르는 벌과 나비를 보며 서로 마음을 속삭여 보라. 당신의 아픈 마음은 벌과 나비의 부지런함에 빠져들 것이다.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날 때면 길섶에 있는 개미집을 만나 보라. 싱그러운 풀 냄새와 개미들의 부지런함과 당신의 아픔을 속삭여 보라. 그것이 자연과의 소통이다.
값진 음식 앞에서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고, 먹다 남은 빵 한 조각에도 감사하는 사람도 있고, 두 다리가 없는 장애우가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기도 한다. 사소한 작은 일에도 짜증 내는 사람도 있지만, 큰일을 당하고도 감사하는 사람도 있다. 호흡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잠을 잘 수 있음에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우리는 실체도 없는 허깨비를 놓고 혼자서 고민한다. 모든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고 누구의 탓도 아닌 나의 몫이 된다. 사람은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행복해진다. 소통의 핵심은 잘 들어주고, 자기의 의견을 솔직하게 내어놓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신앙의 시대와 이성의 시대를 거쳐 공감의 시대로 변하고 있다. 우리 생활에서 공감을 요구하는 영역이 많아지고, 자율주행, 의료, 로봇, 항공우주, 뇌공학 등에서 인공지능 연구가 활발해졌다. 앞으로 법률, 경제, 사회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인공지능을 더 많이 활용하고, 새로운 공감 능력이 요구된다. 고통을 나누는 것이 공감에서 치유로 가는 길이다. 인간은 자신보다 처한 상황이 좋지 않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과 공감하면 더 행복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공감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나 요즈음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고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어졌다. 공감 능력 덕분에 지금까지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고, 역사를 만들었다. 공감하면 엔도르핀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지며, 면역력도 높아지고, 스트레스에 강한 몸을 만든다.
소통과 공감의 핵심은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바꾸어 보는 것이다. 공감하려면 우선 경청이 필요하고, 경청이 소통의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 경청 능력은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는 능력이고, 공감 능력은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타인의 관점에서 느끼고, 이해할 줄 알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다. 공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면 함께 즐거워하고, 다른 사람이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그대로 느낀다. 공감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된 기술이다. 상대의 관점을 존중하며 이해할 수 있을 때 공감 능력이 높아지고, 사회적 관계가 좋아질수록 행복 지수가 높아진다.
우리의 삶은 항상 좋은 일과 궂은일이 반복된다. 삶에 어떤 좋은 일이 있기를 원한다면, 변화에 순응해야 한다. 변화는 오래된 관습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낡은 관습과 집착했던 아집을 버리고 새로운 일에 눈을 돌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힘든 상황이 생기고 어려운 일에 부닥쳤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지가 핵심이 된다. 겪고 있는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중요한 자세다. 자기 뜻에만 집중하며 살면, 오만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때 자기 뜻대로 상황이 풀리지 않으면 부정적인 감정도 생긴다.
수용은 자기 수용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행위다. 자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편이 된다는 것이고 절망에 빠졌을 때 자기 삶을 위해 싸울 수 있게 한다. 자기 수용은 자신의 가치를 믿고 자기 자신에게 전념한다는 뜻이다. 그것으로 남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행동의 내적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 수용은 자신의 신체적 조건이나 심리적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생각과 느낌, 행동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처지를 현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내면이 정직한 사람은 상처를 받아도 다른 사람에게 불평하지 않는다. 정직한 통찰력은 감정적 고통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고통을 줄인다. 자기 수용으로 존재의 힘을 키우면 자기 삶의 소중함을 느끼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수용적인 사람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사람이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한다. 그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람에게서 발견한 기쁨을 표현할 때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큼만 표현한다. 그는 상대방이 줄 수 없거나 할 수 없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스위스 정신과 의사 ‘폴 투르니에’는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절반만 듣고, 들은 것의 절반만 이해하며 그중에 절반만을 믿는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믿는 것의 절반만 겨우 기억할 수 있게 된다.’라고 했다. 사람들이 원활한 소통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지하게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보다 자기가 말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거나 자기 방식대로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소통이 안 되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화가 안 통해서’라고 답한다. 그러면 대화는 왜 안 통할까? 그 이유는 서로의 이념이나 관심사나 좋아하는 것이 다르거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녀와 소통은 어릴 때, 말을 배워 이야기할 때, 아무리 바쁘더라도 잘 들어주는 것이 출발점이다. 부모가 아이의 말이 귀찮아하는 순간 입을 닫는다. 아이가 좋아하는 친구, 음식, 음악, 연예인 등을 같이 공유하면 할수록 아이는 부모와 소통하고 있다고 느낀다.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지해야 하는 아이로서는 소통이 안 되는 부모는 감옥처럼 느낀다.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맞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맞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사람이 아는 지식이나 지혜는 한계가 있고, 각자 하는 말과 논리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자기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잣대로 세상을 보고 내린 결론은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보면 옳고 그름이 바뀔 수도 있다.
황희 정승의 ‘너도 옳고, 너도 옳다, 그리고 너도 옳다’라는 일화가 있다. 집안 노비 둘이 다투다가 한 노비가 다른 노비의 잘못한 점을 고하자, 황희 정승이 ‘네 말이 옳다’고 하고, 이어서 또 다른 노비가 와서 앞서 다녀간 노비의 잘못을 고하자, ‘네 말이 옳다’고 말했다.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황희 정승의 부인이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고 하면 대체 어느 쪽이 틀렸다는 말씀입니까’라고 하자, ‘그 말도 옳소’라고 했다. 황희 정승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아랫사람들에게 공평하게 공감해 준 것이다. 세상에 아닌 것은 없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 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상대방의 생각도 나름대로 옳은 일면이 있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고 인정하는 사회가 함께 행복할 수 있고 누구나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특히 지도자는 상대방의 말을 세심하게 경청하여 상대가 느끼고 생각하는 단서를 정확히 포착해야 한다.
오헨리의 단편소설에 있는 ‘강도와 신경통’의 내용이다. 어느 집에 강도가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강도와 마주치게 되었고, 강도는 총을 들이대며 ‘손들어!’라고 말했다. 집주인은 엉겁결에 왼손만 들었다.
“왜 한 손만 드는 거지?”
강도가 묻자, 주인이 말했다.
“저는 신경통이 심해 오른손이 거의 마비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강도는 표정이 바뀌며 말했다.
“사실 나도 신경통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소. 일도 할 수 없고 잠자기도 어려워, 강도질밖에 할 수가 없었다오.”
이렇게 시작한 대화가 서로의 아픔을 털어놓으며 계속되었다. 증세와 치료 효과에 관해서 이야기하며 분위기가 온화해졌다. 부인은 그 모습을 보면서 주방에 나가 커피를 끓여왔다. 잠시 후에 강도는 집주인에게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다. 강도는 주인에게 치료를 잘하고 속히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서로가 고통을 나누고 약점을 나누면서 강도는 가해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