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지인 사이.
새내기. 설렘과 낯섬의 교차가 쉴 새 없이 이뤄지는 단어. 같은 '학교'란 이름을 달고 올라간 대학교에선 전혀 다른 사회를 마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신청하는 과목이 곧 시간표에 입력됐고, 부쩍 넓어진 대인관계선 존댓말과 반말을 할 상대를 구분하느라 바빴다. 그래도 수업은 알아서 잘 흘러갔지만, 지인들과의 만남은 그러하지 못했다. 애써 웃고, 애써 시간을 비우고, 애써 입에 맞지도 않는 술을 넘기느라 힘이 부쳤다. 그러나 노력해도 힘든 건 나아지지 않았다. 조금 맘을 터놓은 상대가 있다 싶으면, 금새 그 생각은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혼자 도서관에 앉아 있는 사이, 그들은 sns에 사진과 함께 동기들의 계정 링크를 빼곡히 달아놓았다. 그 링크 속 난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신경 쓴 경계 밖에선 알아서들 만나고, 모이고, 웃음을 나누었다. 그 시절 난 관계를 소원(所願)하고, 관계 속에서 소원(疏遠)해졌다.
'소원'이란 단어엔 대표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疏遠하다) 지내는 사이가 두텁지 아니하고 거리가 있어서 서먹서먹하다.
所願하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다.
전혀 다르게 보이는 의미들은 하나의 소리로 들려와 마음 속에서 엉겼다. 뒤늦게 사람들 사이에 속해도 일말의 서운함은 마음 속에서 감돌았다. 몸은 성인이 되었지만, 마음은 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었다. 그 아이의 머릿속은 유치한 질투와 인관 관계에 대한 욕망이 엉켜 어느 감정 하나 제대로 풀지 못했다. 새내기의 봄은 그렇게 흘렀다.
몇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매일 작업실 문을 열고 닫으며 인사를 나눴고, 마감 앞에 유독 빨리 흘러가는 밤들을 함께 지새웠다. 늘어놓는 푸념의 길이만큼 친해지고, 서로의 민낯을 마주하는 횟수만큼 솔직해졌다. 시간의 힘을 조금은 믿게 되었다. 물론 이따금씩 너무나도 지쳐 옥상에 올라 오랜 친구에게 수화기 너머 하소연을 맥락없이 해댔던 날도 있다. 그럼에도 시간은 모든 걸 조금씩 무디게 만들어 주었다.
차분히 새학년 새학기를 떠올렸다. 왜 그리 안달이었는지 모른다. 넓다고 느껴졌던 사회도 결국은 40명 채 남짓한 이들의 모임일 뿐이었고, 대학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머릿수가 있으며, 사회에 나가면 이 또한 일부로 존재했다. 그 작디 작은 호숫가서 물장구를 치느라 허덕였다.
그래도 헛된 날들은 아니었다. 노력으로도 잡기 힘든 것들엔, 오히려 마음을 조금 놓을 줄 아는 법을 배웠다. 어차피 새로이 만날 사람들은 앞으로 더욱 많을 테고, 힘든 건 당연할 거다. 그러나 이젠 불안을 그 힘듦 안에 집어 넣지 않아 보려 한다. 그만큼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많은 추억을 쌓을 기회가 주어진단 건 분명 행복하지 않은가. '소원'이란 단어가 내게 주었던 엉긴 실타래는 조금씩 풀릴 방도를 찾아내고 있는 것 같다.
다시 '소원'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같은 단어에 여러 의미들이 중첩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어 소원을 빌지만, 결국 소원해지는 누군가가 이따금씩 생긴다는 것. 그건 누구의 잘못일 수도 있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우리에게 인생의 역설을 알려주는, 보다 깊은 의미를 건네는 단어이지도 않을까. 오랜만에 불어오는 서늘한 밤공기를 들이쉬며 위안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