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품기] 임신 31주차, 어느날의 생각.

by 백문아

벌써 임신 후기인 31주차이다. 테스트기의 선명한 두줄을 확인하고 얼떨떨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만삭처럼 부른 배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또 문득 실감하게 된다.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이제 제법 큰 몸집으로 쿵쿵거리는 아기의 태동때문에 꿀렁거리는 배를 보고 있으면 꼭 내 배가 시한폭탄인 기분이 든다. 터지기전 빨갛게 빛을내며 요란하게 타들어가는, 게임 아이템으로나 쓰일 것 같은 쇠구슬처럼 동그란 그 폭탄말이다. 그 폭탄은 시간이 지날수록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점점 불러오고, 이제 곧 뻥- 5월이 되면 폭죽처럼 터져 예쁜 아가를 빚어내겠지.


임신 전에도 늘 생각이 많고 고민이 넘쳐 우울감에 자주 빠지던 나는, 임신을 하자마자 문득 드는 고민이 있었다. 바로 '산전 우울증'이다. 임신을 하게 되면 변화하는 호르몬 때문에 감정 기복이 더 널을 뛰고, 또 하루가 다르게 (안 좋은 쪽으로) 바뀌어가는 내 배, 수박처럼 줄이 죽죽 그어지는 튼살, 걸을때마다 윽-소리와 함께 찌릿해지는 허리, 먹고 싶은 것을 맘대로 먹지도 못하게 만들 정도로 울렁이는 입덧 등등 다양한 증상 때문에 멀쩡한 사람도 절로 우울해진다는 소리를 자주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또 회사에서의 업무 연속성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금 일찍 휴직을 하게 되어, 바쁘게 일을 하며 신경을 다른데로 돌릴 상황을 만들기도 여의치 않아 더욱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웬걸, 25주차까지도 입덧약을 달고 살고 차만 타면 멀미를 하던 난관을 무사히 극복한 나는, 어쩐지 우울에 빠져 생각에 잠길 시간이 잘 없다. 회사를 휴직하기 전에는 일을 쉬게 된다면 천천히 나의 생각 모음집에 푹 빠져 보고, 이 실타래들을 조금씩 엮어 글을 종종 써보겠노라고 회사 동료에게 잘난체하며 엄포를 놓았던 것 같은데, 요즘의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하루의 7할을 넘어가는데도 참, 생각의 전원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가만히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누워있다보니 기분이 다운되는 것은 맞으나, 이 울적한 기분이 무엇때문인가- 생각을 곰곰 해보려하다가도 이내 관둬버린다. 그냥 졸리다. 임신전에 졸피뎀이 없이는 못 자던 내가 낮잠도 두 세 시간은 기본으로 잔다.

어쩌면 임신은 그런게 아닌가 싶다. 어디에선가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면 뇌가 본능적으로 '육아 모드'로 바뀐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 기분과 감정, 생각이 젤 중요하던 임신 전의 시간을 지나, 지금의 나의 뇌는 그저 내 뱃속에 꿈틀거리며 자라나는 새 생명을 지키고자 온 신경을 쏟아 모드를 변경한 것 같다. '우울 모드'에서, '우울이고 나발이고 일단 아기 키우기가 가장 소중하니 우울하면 일단 자라 모드'로 바뀐 것 같달까. 그래서인지 뇌가 늘 멍하고 몽롱한 상태여서, 한동안은 글을 쓰기는 커녕 쓰여있는 글을 읽는 행위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31주차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보고나서야, 조금씩이라도 내 인생에 어쩌면 한번뿐일, 임신시기의 일기를 조금이라도 써내려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이제서야 글을 써본다. 이제부터 일부라도, 조금씩이라도 기록해야지.


어쨌든 다행이다. 무탈한 임신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


귀여운 아가야, 어서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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