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더 먹었다고 다 어른은 아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지만, 그 공평한 시간을 어떻게 채웠는지는 모두 다르다.
일정이 있어 기차를 타려고 역 플랫폼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고3 수능을 마친 후 친구들과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간 일이었다. 나는 서울역에서, 친구들은 영등포역에서 각각 기차에 올라 같은 좌석에서 만났다.
그렇게 반가움과 설렘으로 시작한 우리의 부산 여행은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첫 번째 자유였기에, 모든 경험들이 신기하고 재밌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낯설고 두렵기도 했다.
당시 우리는 어른들 눈에 그저 어린 아이들이였을 것이다. 부산에서 겪은 여러 일들도 그러했다.
어쨌든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서 기차에 몸을 싣자마자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깼다.
“어린 것들이 어디서 남에 자리에서 쳐자고 있어!”
기차 한 칸이 떠나갈 만큼 큰 소리였다. 부산에서부터 먼 거리를 타고 온 우리가 들을 소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눈앞에 서 있던 노부부는 당장이라도 우리를 한 대 칠 것처럼 화가 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자신들이 탈 기차가 아니라 하나 앞선 우리의 기차에 잘못 탄 것이었다.
역무원이 와서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알게 됐지만, 사과나 미안한 내색은 전혀 없었다. 역무원이 지나갈 때까지 우리가 들었던 욕설과 고함들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어버렸다. 그 노부부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에게 주었던 이유없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30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도 선명한데 말이다.
그들은 되려 “우리는 늙었으니까 너희 젊은 것들이 당연히 자리를 양보해야지!” 라며 으름장 소리만 높아졌다.
뒤에 앉아 있던 아줌마마저 우리에게 “그래도 어르신들이니 자리를 양보해주는 게 좋지 않겠냐”고 은근히 강요했다.
결국 우리들은 자리를 내주고, 기차와 기차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서서 돌아가며 남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노부부는 미안해하기는커녕, 우리를 바라보며 신발벗은 발을 친구와 내 자리 사이 사이 마다 뻗어 앉았다. 그 불쾌한 광경과 무례한 태도는 어린 나에게 선명한 교훈을 남겼다.
‘나이를 먹었다고 다 어른은 아니구나.’
그리고 오늘, 다시 비슷한 일을 목격했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 자주 목격했기에 피곤이 밀려온 오늘은 좀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남성이 자신의 자리라고 조심스레 말을 걸자,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노인은 역 한 칸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이 기차 서울역 안 가! 이건 완행열차라고!”
하지만 분명 이 열차는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차였고, 그 칸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서울역을 목적지로 하고 있었다. 결국, 정작 자리가 맞았던 그 남성은 노인의 계속된 우김과 호통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기차 칸 사이 좁은 공간으로 몸을 피했다.
잠시 후, 옆에 앉아 있던 승객이 나에게 갑자기 큰 소리로 물었다.
“이거 서울역 가는 거 맞죠?”
그 승객이 왜 그렇게 큰 소리로 물었는지, 그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네, 서울역 가는 기차 맞아요. 저도 서울역으로 가요.”
그 말들이 마음에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지나가던 역무원에게 자신의 차표를 들이밀며 그 노인은 자신의 결백을 그 역무원에게 밀어넣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세 그 자리의 주인은 그 관경을 목격했는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역무원에게 구원에 눈빛을 보내며 서 있었다.
결국 자리는 자리의 주인에게 본래의 자리를 양보하고,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칸 사이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본래 자리 주인에게 미안함이나 사과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25년 전과 똑같은 모습이 반복되는 오늘의 광경이 씁쓸했다. 어른이 되는 건 나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과 태도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생각했다.
시간이 흐른다고 모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게 해준 두 번의 기차여행이, 서로 다른 시간 위에서 겹쳐지고 있었다. 내 친구들의 얼굴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