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코 부시 지음 (2024년 4월 18일 , 추천: 책방지기)
벌써 1년도 훨씬 지난 이야기의 시작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우연히 코로나 전부터 알고 있던 독립서점 우분투북스에서 독서모임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흔하디흔한 이야기지만, 어제 일도 희미한 중년의 나에게 작년 4월의 기억은 마치 땅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달의 숨결처럼, 존재하되 손에 잡히지 않는 망상이다.
그저 오랜만에 쉬었던 독서모임을 다시 연다는 말에 신청을 했었고, 인원이 다 찼다는 답을 들었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자 했던 찰나, 책방지기가 한 타임 더 모임을 열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다.
코로나 이전에 자주 드나들던 우분투북스는 여전히 책방지기의 모습처럼 침착했다. 길고 좁은 복도 같은 공간, 오른쪽 벽면을 따라 놓인 책들은 마치 어디론가 안내하는 이정표처럼 여전히 길을 안내 한다. 복도를 따라 계산대를 지나면 있는 왼편의 작은 공간에는 네댓 명 앉으면 딱 좋을 듯한 테이블이 있고, 낯설지 않은 의자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간과 팬데믹이 흘렀어도 그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단정했다. 예전엔 책 한두 권 사서 돌아 나오던 방문이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나를 포함해 고은님, 책방지기, 그리고 아마 한 분쯤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안계신 분인것 같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렇게 첫 책,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을 펼쳤다.
책의 저자 아키코 부시는 “사라짐은 은둔이 아니라 존재의 다른 방식”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온라인과 네트워크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시대, 역설적으로 그 속에서 점점 더 자신을 잃어버린다고.
그의 책은 ‘투명성’과 ‘가시성’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오히려 ‘익명성과 사라짐의 가치’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여덟 편의 단상으로 이루어진 이 에세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비춘다.
저자는 SNS, 데이터 추적, 위치 기반 기술로 인해 모든 존재가 끊임없이 드러나길 요구받는 시대를 짚어내며, 투명성이 미덕처럼 강요되는 사회의 강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음이 결코 소외나 결핍이 아니라, 선택된 자유일 수 있다고 말한다. “존재의 깊이는 노출의 정도가 아니라 인식의 질로 결정된다”는 문장은, 드러남과 존재를 동일시해온 사고에 균열을 낸다.
이어 익명성은 정체성의 부정이 아니라 재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여백으로 제시된다. 도시의 거리와 뉴욕의 지하철 속에서 이름이 지워진 개인은 오히려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한다. 그 장면은 나에게도 유독 오래 남았다. 도시 속 익명성 속에서는 나 역시 자유롭다. 아무도 나를 모르기에, 역설적으로 내가 더 선명해지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자연으로 시선을 옮기면 ‘사라짐’은 생존의 기술이 된다. 새와 곤충, 물고기의 위장을 통해 저자는 자신을 감추는 행위가 부정이 아니라 지속을 위한 전략임을 보여준다. 인간에게도 그러한 캠플라주가 필요하다는 제안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낚시를 다니고, 캠핑을 즐기며, 자연과 거리를 조율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이미 각자의 방식으로 사라짐을 연습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집 창고에 쌓여 있는 캠핑 장비들이 스친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젓는다. 나에게 그 단계까지 가기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예술가들의 사례는 이 사유를 한층 깊게 만든다.
월터 벤야민, 에밀리 디킨슨, 조르지오 모란디처럼 세상과 거리를 둠으로써 오히려 더 선명한 세계를 만들어낸 이들. 저자는 말한다. “사라짐은 존재의 희미화가 아니라 초점의 이동이다.” 또렷함을 얻기 위한 흐림이라는 말 앞에서, 얼마 전 맞춘 노안 안경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어떨땐 나에게서 나오는 모호함이 전달이 되지 않아 답답하거나 힘들때가 있다. 특히 나라는 사람은 더 그런것 같아 다른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고민을 해본적도 적지 않다. 그럴때마다 신기하게도 어쩌다 찾은 문장들이 괜찮다고 날 다독여줄때가 있다.
"모호함으로 가득한 시가 다른 시보다 더 전체적으로 강렬하게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나는 제대로 전달되면 모호한 생각이 분명한 생각보다 사실상 더 많은 영향을 주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47p)
책은 사회의 감시적 투명성을 비판하며, 기술이 만든 ‘사라질 수 없음’의 상태를 성찰로 이끈다. 마지막에 이르러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일.”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 그것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기술이라는 선언처럼 책은 조용히 마무리된다. 그렇게 우분투 책상의 첫 번째 책과, 그 책을 매개로 이어졌던 모임지기들의 이야기 또한 함께 끝나가고 있었다.
작은 독립 서점의 공기 속에서 사라짐을 이야기하던 그 시간, 아이러니 하지만 사라짐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함께 해낸 사람들 — 진심으로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감각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라짐이 곧 존재라는 말을 한 번 더 남기며, 그렇게 우리는 다음 모임을 다짐하고 기다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