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문득 내 모습이 어릴 적 보았던 40대 직장인 아저씨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비혼 여성이다. 언제부턴가 '미혼'이라는 용어보다 '비혼'이라는 용어가 더 흔해졌다. 두 용어의 의미 차이를 찾아보니 비혼에는 의지적으로 결혼하지 않았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미혼녀일까, 비혼녀일까.
내가 어릴 적 보아왔던 40대 아저씨의 모습은 이렇다.
- 늘 일에 치여서 살아간다.
- 퇴근 후에는 밥상을 받는다.
- 머릿속에는 앞으로 뭐 해 먹고 살아갈까에 대한 생각으로 충만하다.
- 집에 와서는 TV(지금은 핸드폰)를 보다가 곯아떨어진다.
- 드라마보다 뉴스를 좋아한다.
나의 모습이다. 결혼을 하지 않으니 나에게 여자의 삶이란 없다.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의 역할이 없으니 그저 눈 뜨면 회사를 가고 하루종일 일만 하며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팍팍한 대화만 오고 갈 뿐이다.
사실 어릴 적부터 의식적으로 내가 여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너는 여자니까~' '여자는 말이야~'라는 식의 대화가 오고 간 적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여자임을 인식한 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당시 남자들이 7:3으로 많은 학과에 입학을 했는데 남자 동기, 선배들이 하나같이 나를 동등한 인간이 아닌 여성(sex)으로 대하는 데 놀라움과 답답함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다. 어떻게 해도 그저 나를 여성으로만 보는 그들 앞에서 평생 여자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온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여자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자아실현이 더 중요하고 흥미로웠던 나는 어느새 시간에 흘러 타의 반 자의 반 대한민국 40대 미혼녀가 되었다. 다른 것보다 먹고살 걱정이 가장 중요하고, 회식자리에서는 적당히 분위기를 맞춰주고, 집에 와서 잠만 자는 나를 보며 그 옛날 우리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여자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소망보다는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큰 나는 대한민국 40대 비혼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