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누군가의 말을 빌려 스스로를 정의하게 된다.
“나, 공황이래.”
그녀가 내게 무심히 툭 내뱉었다. 그리고 고해성사하듯 주저하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뒤부터,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다 불편해졌어.
사람들이 날 ‘공황 환자’로 보면 어쩌지?
자꾸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그전까지 그녀의 마음에 머물던 감정들은 흐릿하고 경계조차 없는--
‘별일 아니야’ 하며 무심히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어느순간, '공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낯선 힘을 얻는다.
이름을 붙인 사람이 사회적 위상이 높거나,
혹은 내게 의미가 큰 사람일수록,
그 힘은 아주 강력하게 작동한다.
우리를 규정하고, 통제하고, 때로는 지배한다.
이름이 생긴다는 건
정의되고, 규정되며, 해석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우울증”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외로움’이라는 공식에 따라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고,
“그건 트라우마야.” 라는 한마디에
내 기억은 병리적인 서사로 전환된다.
그 틀 안에서 기억을 되짚는 나를 발견한 순간,
왠지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붙이는 이름 하나에
누군가가, 혹은 내가, 갇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명명됨으로써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하고 위로를 얻기도 하지만,
어떤 이름은 낙인이 되어,
드러내지 않은 내 안의 모든 것을 단정짓는다.
이름이 없는 감정은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다는 건,
어쩌면 무한한 자유를 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의 해석도, 공식도 닿지 않는
오직 나만의 언어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과 해석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나를 정의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 안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감정과 마주하고,
그저 ‘존재하는 나’로 머무를 수 있다.
나는,
아직 쓰이지 않은
나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