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실

정착되지 않은 영혼을 위한 어둠의 시간

by 달박상

밤새 잠을 설친 나는,

그의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털썩 주저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숨도 못 잤어. 도무지 어제 일이 잊히지 않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다양한 크기의 필름 중 하나를 내 앞에 내밀었다.


5월이나 6월쯤, 그의 집 앞 이팝나무 군락을 찍은 사진이었다.


투명하고 얇은 필름 안에 갇힌 풍경이

깊이 가라앉은 기억처럼 추상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사진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하나는 흑백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옅은 갈색이었다.

색상과 톤이 다를 뿐, 둘 다 같은 필름에서 비롯된 사진이었다.


"이건 영혼, 이건 반영."


독특한 그의 화법을 빌리면

그 둘은 같은 영혼이지만, 서로 다른 이미지로 태어났다.


"보여줄 게 있어."


그날, 나는 그의 암실을 처음 만났다.


긴 복도를 지나고 코너를 도는 순간—

벽을 가득 채운 거대한 그라피티와 마주쳤다.


사람의 실루엣이

점점 작아지거나 커지는 모습으로 이어지는,

오로지 흑백의 명암 만으로 그려진 형상들이었다.


마치 벽이 진동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가끔씩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아야 했다.

나는 벽화 중앙에 그려진

강렬한 두 눈동자와 마주치고는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


왜 이렇게 무서운 그림을 그린 거냐 물었다.


"저건 마트료시카 같은 거야.

삼신이나 마고처럼 출산을 관장하는 신이지.

암실이 시간을 품은 이미지가 탄생하는 곳이라서

출산과 빗대어 상징적으로 표현한 거야."


셔터를 누르는 순간, 필름은 시간을 삼킨다.


시간을 품은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는

특별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상과 인화


현상은 필름 속에 숨겨진 시간을 정착시키는 일이고,

인화는 정착된 시간을 이미지로 해방시키는 작업이다.


필름 속에 갇힌 시간은

이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쪽이야."


경고처럼 선명한 두 개의 눈동자 아래에

암실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나는 커다랗고 따뜻한 손에 이끌려

낯선 어둠 안 묵직한 검은 커튼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 뒤로

더 짙은 어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커튼을 ‘영혼을 불어넣기 위한 밤의 베일’이라 말했다가,

곧 ‘빛을 완벽하게 차단하기 위해서’로 고쳐 말했다.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꼭 두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같은 말을 다른 식으로 표현했다.

그렇지만, 그런 그의 화법이 싫지 않았다.


암등은 희미한 붉은빛이 겨우 분간할 만큼의 빛만을 허락했다.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배인 무거운 공기—

처음 보는 암실의 모습은

마치 연금술사의 실험실처럼 신비롭게 느껴졌다.


낯선 기계, 칸칸의 선반, 정체 모를 액체가 담긴 플레이트,

그리고 벽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붉은 등으로 시선이 조금씩 옮겨졌다.


암등 옆으로 쳐진 가는 줄에는 인화를 마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사진을 보기위해 손을 뻗는 순간,

그가 다급히 내 손을 잡았다.


“아직 만지면 안 돼. 영혼이 정착되지 않았거든.”

아니나다를까, ‘아직 건조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야.’라고 고쳐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알지 못하는 말 뒤에 숨은 그의 진짜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의 손을 잡은 채로,

줄에 걸려있는 사진 중 하나를 가리키며 씩 웃었다.

암실에 들어오기 전에 보여준

두 장의 사진과 같은 필름으로 인화한 사진이었다.


광고에 들어갈 사진이라며 덧붙여 말했다.

"광고라는 건 기억을 설계하는 일이니까."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게,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은지를 선택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암실은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영혼이 깃든 이미지를 만나기 위해서

완벽한 어둠을 견디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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