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보이지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럴 리가 없었다.
차트는 그가 전맹임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시신경이 위축되어, 시각 정보를 뇌로 보낼 수 없는'
그것이 의학이 설명하는 그의 상태였다.
그의 말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시각 장애를 가진 제가, 당신이 보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건,
떨림이 가진 고유한 파동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내게,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 역시 대답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 듯했다.
“이해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니까요.
거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원리가 작용하고 있어요.”
나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바짝 다가갔다.
그 바람에 테이블 밖으로 튀어나온 차트가 팔에 걸리면서,
위에 올려놓은 만년필이 그의 앞까지 굴러갔다.
만년필을 손으로 잡은 그의 톤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건... 선명하게 보이는 것에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슴 한가운데서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나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믿음’이란
그 대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전제를 품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에 대한 믿음, 희망에 대한 믿음처럼 말이지요.”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치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뜨거운 홍차가 담긴 컵의 손잡이를 돌려
몇 모금 마신 뒤,
찻잔 받침 위에 소리없이 내려놓았다.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는
마치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허공에 펼쳐
새로운 언어로 번역해 내는 듯 보였다.
“저는 당신들이 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쉬울까요, 박사님?”
한결 온순해진 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과,
지나간 당신의 기억을 보는 것이
제게는...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만년필을 내게 건네며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아버지를 믿었어요?"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중학교 때, 만년필을 쥐어주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 다시 살아난 것만 같았다.
"...아빠, 믿지?"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때의 어린 나는 아버지를 믿지못했었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조용히 내 안에 감춰둔 현실과 기억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어쩌면 짙게 감도는 홍차 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200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