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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B Nov 21. 2023

연애는 삼키고 결혼은 뱉기

전세사기 (1)

2020년 9월. 다람쥐처럼 축적해 둔 쌈짓돈을 모아 월세집에서 전세집으로 옮겼다. 함께 산지 3년만에 전세로 옮기는 것이었다. 전세금이 많지 않았던 탓에 서울의 서쪽으로 밀려나게 되었지만 집을 넓혀간다는 기쁨, 고정비가 엄청나게 줄어든다는 안도감 같은 것들이 나를 뿌듯하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전세계약서에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사기를 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새벽까지 이어지는 야근으로 바빴던 B를 대신해 전세집을 보러 다녔다. 신림에서는 우리 예산에 맞는 집이 없어 마음이 약간 조급한 상태였다. 그러다 어느 한 공인중개사를 만났고, 어쩐지 사기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약간 넙적하고 시시껄렁한 인상의 그는 돈이 없어도 전세에 살 수 있다며 신용 등급만 괜찮다면 대출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신축 빌라를 추천하기도 했다.

우리는 중소기업 전세 대출로 1억을 받을 생각이었다. 나는 무조건 1억 5천 이내 중소기업 전세 대출이 가능한 매물을 추천해달라고 고집했다. 보증보험도 가능한 집으로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보증보험은 어차피 전세 들어가고 난 뒤에 가입할 수 있어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중개사와 달리 차분하고 조용한 성정의 중개보조인이 집을 세 채 소개해줬다. 처음에 보여준 집이 마음에 들어서 마음에 든다는 티를 많이 냈는데, 보조인이 갑자기 집에 대한 단점을 마구 얘기하기 시작했다. 보조인의 얘기를 들으며 신뢰감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아마도 수수료를 주지 않는, 본인들 입장에선 버리는 집이었겠거니 싶다.

두번째, 세번째 집도 다 마음에 들었다. 신림과 달리 강서구에는 제법 괜찮은 컨디션의 집들이 많았다. 두번째 집은 역이랑 가까운 대신 약간 좁았고, 세번째 집은 산꼭대기에 있는 대신 깨끗하고 넓었다. 나는 테라스와 테라스에서 보는 전망에 (지대가 높았던만큼^^ 전망이 좋았다) 눈이 뒤집혀 세번째 집을 원했다.


다음날 시간을 낸 B와 함께 다시 집을 방문했는데 B는 그래도 역이랑 가까운게 좋을것 같다고 두번째 집을 원했다. 사실 두번째 집이나 세번째 집이나 크게 상관 없어서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갑자기 중개사가 그 집은 근저당이 잡혀있는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계약을 할거면 근저당 말소 조건을 특약으로 넣고, 계약날 집주인과 함께 은행에 가서 돈을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번거로워 보였던 우리는 결국 그냥 근저당도 없고, 등기부등본도 깨끗한 세번째 집을 계약하기로 했다. 대신 대출이 나오지 않으면 계약금을 돌려주겠다는 특약을 쓰고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B와 함께 세번째 집을 보러 갔을때, 그 집에 먼저 살고 있던 부부가 있었다. 밥을 먹고 있던 중이었는지 먹다 남은 비빔밥 그릇이 보였다. 중개보조인과 부부가 뭔가 이야기를 했는데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드문 드문 중개보조인의 "그건 곤란해요"..."그러니까...아시잖아요?"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집구경을 끝낸 후 중개보조인의 차를 타면서, 내가 저 분들은 왜 이사를 가시는 거냐고 물어봤다. 중개보조인은 청약이 되셨다며, 그 기간동안 시댁으로 들어가신다는것 같다고 대답했다.


계약서를 쓰기로 했던 날 집주인을 처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집주인도 느낌이 뭔가 쎄했다. 말이 별로 없었고, 어쩌다 한 마디를 하면 어딘가 어수룩한 느낌이 났다. 계약할 때 집주인의 주소도 확인할 수 있는데 집이 아주 많은 임대사업자라더니 정작 본인 집은 어느 빌라의 반지하였다. 그는 PD수첩에도 나왔던 아주 유명한 집주인이었지만, 그때는 방송을 타기 전이었으므로 그의 정체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신림으로 돌아오면서, 서로 말하지도 않았는데 구글에 집주인의 이름을 검색해보고 있었다. 계약금 750만원을 포기해야하나? 하는 생각까지 동시에 하고 있었다.

조상신께서 사이렌을 보내고 있었던 것인지,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할 이유가 없었다. 근저당도 없었고 등기부등본도 깨끗했다. 최악의 최악에 달해 집이 경매에 넘어간다고 해도 대출금만큼은 지킬 수 있어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최악에 달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때의 우리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느낌' 뿐이었다. 그래서 그 '느낌'만을 이유로 전세와 계약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B는 중소기업 대출 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출은 무사히 승인이 났고, 이사일자도 확정이 됐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의 서쪽, 산 꼭대기에 위치한 빌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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