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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돌이 Apr 19. 2016

퇴사여행, 일본에서 만난 디지털노마드

대기업 퇴사를 둘러싼 100일간의 이야기

 회사 생활을 하며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여행을 택했다. 미리 결제한 비행기표와 숙소를 생각하며 힘든 시기를 한 번씩 넘겼다.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매일 별을 보며 퇴근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여행의 힘이었다.


 겨우 2~3일 연차를 쓰고 주말을 합쳐서 떠나는 여행이지만 스트레스의 근원지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보겠다는 치기 어린 생각으로 해외여행을 선택했다. 치열한 연말을 보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새해의 주요 일정들이 잡혀 있었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조정될 가능성도 있기에 휴가를 쓸 수 있는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위에서 각 팀별 연간 휴가 계획 초안을 작성해서 보내라는 메일이 왔다. 연차 사용을 장려하기 위한 방법인데 효과가 조금은 있다고 본다. 연간 휴가 일정을 일단 올려두면 특별한 상황이 없는 한 휴가를 신청하기 위해 눈치 볼 일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팀장님을 포함한 모든 구성원들의 일정을 받고 마지막에 필자의 일정을 추가한다. 다행스럽게 미리 찍어 두었던 날들이 비어있었다. 휴가 계획을 제출하고 항공사 홈페이지를 한 번씩 둘러봤다. 특가 항공권을 노리기 위해서다. 일본 오사카로 가는 왕복 비행기표를 단돈 10만 원에 획득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때만 해도 몰랐다.


이 여행이 퇴사 여행이 될 줄이야


 여행 준비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 기동성이 떨어지는 캐리어는 집에 고이 모셔두고 배낭 하나 들고 출발이다. 미리 빌려둔 가이드북을 읽으며 공항으로 향했다. 일본어는 고등학교 때 배운 게 전부라 급하게 필요한 단어 몇 가지만 암기했다.



이거 얼마에요? 깎아주세요


 일본에 도착해서 일단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여 저렴한 숙소를 잡았더니 골목 안으로 한참 들어가야 했다. 역시 싼 가격에는 이유가 있었다. 2층 침대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그덕 거렸고 수용 인원 대비 화장실과 샤워실은 적었다.


 잠만 잘거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로비로 내려가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짜 둔 일정이 있기에 그냥 간단히 인사만 하고 관광지로 향했다.



 저녁으로는 초밥을 먹었는데 역시 원조의 맛은 달랐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 위해 가이드 북이 아니라 현지인이 찾는 식당을 구글에게 물어봤다. 가격은 좀 비싸다 싶었지만 100엔에 900원 초반의 환율 덕분에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아까의 그 무리들은 여전히 로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약속이 없다면 합석하라는 키 큰 외국인의 말에 슬쩍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3시간이 지났다

 

 30분만 있다가 씻고 내일 여행 일정을 짜려던 계획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하루 종일 로비 겸 카페테리아에서 온갖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도 3시간이나 더 이야기 꽃을 피웠다. 마침 주제가 떨어져 가던 참인데 게스트하우스의 유일한 한국인이 등장하니 냉큼 포섭을 시도한 것이다. 자리에 앉아 관등성명을 대고 어느 나라에 가든 빠지지 않는 질문에 대답을 했다.


North? South?


 자정이 넘어가자 다음 날 일정이 있는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고 5명만 남았다. 유럽에서 온 3명의 외국인들은 모두 프로그래머라고 했다. 두 명은 프리랜서, 다른 한 명은 일본 지사에 파견을 왔다가 일본의 생활환경이 좋아서 연장을 신청했다.


 말로만 듣던 디지털 노마드 눈 앞에 있었다. 디지털노마드(Digital Nomad)라는 단어는 프랑스의 경제학자가 처음 소개한 단어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며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유목민들은 가축을 길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얻은데 반해 디지털 노마드는 첨단 기기로 무장하고 생활을 영위한다.



 프랑스 출신의 30대 초반 프로그래머는 일본에 한 달 정도 머무르며 낮에는 관광을 밤에는 일을 해왔다. 본인의 할당량을 다 채운 상태라 앞으로 며칠은 더 여유가 있다고 했다.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여러 툴이 있어 장소에 구애받을 일이 없고 급한 부분은 화상 회의로 해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 출신의 프로그래머는 1년 이상의 장기 프로젝트를 마치고  일본에 왔다.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사업 아이템이 있는데 휴식 겸 시장분석 중이라고 했다. 일자리는 언제든지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사업을 제대로 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자신감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북유럽 출신의 개발자는 일본에 파견 왔다가 기간을 연장해서 눌러앉은 케이스다. 자국 음식보다 일본 음식이 더 맛있다고 할 정도로 일본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었다. 일본에서 하는 업무는 혁신적인 개발보다는 안정화하는 작업이라 개발자로서의 성장에는 마이너스 요인이지만 삶의 질 측면에서는 아주 만족한다고 했다.


 세 사람 모두 미혼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북유럽 출신 개발자는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면 실례가 될 것 같아 가만히 있었는데 맥주 한 캔을 더 비우더니 자신은 자유롭게 세계를 떠돌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자신은 절대 게이가 아니라고 강조)


 다른 두 사람도 자세한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고 즐겁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그냥 하루 종일 쉬기도 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일할 때도 있다고 한다(소량의 알코올은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위험하고 부러운 발언도 했다)


 새벽까지 함께 떠든 인연으로 다음날 하루 투어를 함께 했다. 정확히는 반나절 투어였다. 반나절을 신나게 놀고 각자의 일정에 따라 자연스럽게 작별을 고했다.


저렴한 가격만큼이나 허름했던 일본 게스트하우스에서 의외의 큰 소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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