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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도 May 22. 2020

방구석 추억여행 도중 현타 온 이야기

충동 귀국 일기 2

나는 프로 박싱러(boxing-ler: 짐 싸는 사람이라는 뜻, 물론 사전에 없는 말이다) 여야 한다.


전교생 기숙사 시스템이었던 고등학교는 매 분기 새로운 방에서 새로운 룸메이트들과 살아야 했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일본에 가서는 졸업할 때까지 이사를 네 번, 취업과 동시에 도쿄로 가서는 이사를 또 네 번. 그동안 매년 부지런한 해외여행과 해외출장들까지. 아참, 고등학교를 휴학하고 1년간 유학했던 중국에서도 이사를 한 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짐을 싸는 데에 최소 며칠에서 일주일이 걸린다.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 데에는 내 나름대로 적당한 이유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추억여행이다. 이사를 자주 다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짐을 싸며 발견하는 옛날 사진들, 편지들, 심지어는 오랜 시간 열어보지 않은 책 사이의 책갈피 등등 온갖 잡동사니에 마음을 뺏긴다. 어질러진 방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추억여행을 한다. 그러다 차를 끓이고, 과자를 찾아 먹으며 본격적으로 게으름을 피우다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둑한 저녁이 되고, 그러면 짐 싸기는 다음날로 미루는 것이 내 루틴이다.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을 준비하느라 나는 또 한 번 짐을 쌌는데, 고등학생 시절 책을 읽다가 발견한 마음에 드는 글귀들을 빼곡히 적어놓은 수첩을 발견했다. 뒷장으로 갈수록 글씨체가 삐뚤어지고 오타도 많다. 살짝 졸리고 지루해져 글씨들을 대충 휘갈기던 순간들이 생각난다.


열여덟 살 고등학생의 마음을 울렸던 글들은 무엇이었으려나 하고 하나하나 읽어봤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의 내게도 울림을 주는 것이었다. 그 순간 느낀 감정은 뭐랄까, 감동이나 설렘보다는 당황스러움이었다. 수첩을 열면서 내가 기대했던 건, 오랜만에 찾은 초등학교 운동장을 봤을 때의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와 달리 작게 느껴지는 초등학교 교정. 그 장소가 작아졌을 리는 없으니 내가 많이 커졌고 나이를 먹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그 느낌을 수첩에서도 찾으려고 했는데 그런 낯섦은커녕, 심지어 수첩 중간 즈음에 적힌 조르바의 말은 내가 아직도 심심찮게 인용하는 구절이었던 것이다.


지성의 지경을 넓히는 데에 소홀히 했던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던 추억여행이었다. 하필 10년이야.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이걸 우직하고 한결같다고 할 수도 없고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작가들이, 책들이 너무나 훌륭해서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울림을 주는 거라고 애써 나를 달래 본다. E-book을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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