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수 50명 미만의 미국계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사장님과 임원들이 모두 한국인이었기에, 외국계 회사지만 한국회사의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사장님은 미국 본사에서 임명한 사람이었으나 본사에서의 연줄은 없는, 월급사장이었다.
외국계 회사에서의 사장이라는 자리는 대부분 해외 본사에서 임명한다. 이때 Fast track이라는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키운 인재를 보내는 경우와, 해외 지사를 설립하면서 면접을 통해 지사장을 뽑는 경우가 있다.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키워진 인재는 해외 본사에서 적극적인 케어를 한다. 본사에서 일정 기간 교육을 받은 후그 인재는 다양한 국가에서 경험을 쌓게 된다. 한 국가에서 최대 2-3년 동안만 근무하고 다른 나라로 옮기는데, 그 기간 동안 성과를 얼마나 냈는지가 무척 중요하다. 그래서 Fast track으로 키운 인재가 본사에서 우리의 사장으로 오면, 직원의 입장에서는 꽤 피곤해진다. 프로젝트가 늘고 일은 많아지는데 비용 절감을 하느라 보상은 늘지 않기 때문이다.이 인재는 각 국에서의 순환 근무를 마치면, 해외에 있는 본사로 돌아가서 주요 직급을 맡게 된다.
반면 면접으로 뽑는 지사장은 또 한 명의 직원일 뿐이다.해외에 있는 본사와 국내 지사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중요 인물이지만, 혹여나 본사가 한국 시장에서의 철수를 결정하게 되면 일자리가 없어지는, 본사의 케어를 받지는 못하는사장. 순환근무가 강제되지 않아 한 회사에 오래 있을 수 있고그래서 회사에 대한 애정이 큰 편이며,단기간에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이 덜하기에직원들을 대할 때 있어 조금 더 인간적이다.
사장님은 두 번째 케이스였다.
회사에는 'whistle blow'라는 내부 고발 시스템이 있었다. 누군가 회사에서 일어나는 부정에 대해 고발하면, 해외에 있는 본사로 바로 보고가 들어간다. 시스템을 통해 고발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중간에서 누군가가 개입을 하거나 덮어버릴 수 없게 되어있다. 그 시스템을 통해, 누군가가 사장님의 부정을 고발했다고 한다.고발 사유는사장과 임원의 불륜, 그리고 그에 따른 회사의 피해.
누구도 대놓고 얘기하진 않았지만 고발자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사장님과 5년 넘게 같이 일해온 두 명의 임원들. 한 명은 지사장 자리를 노렸고 또 한 명은 불륜 상대방으로 지목된 임원을 견제해서 일을 꾸몄다고 한다.겉으로는 누구보다 사장님의 비위를 잘 맞춰왔던 그들이지만, 물 밑에서는천천히, 그리고 철저히 사장을 몰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반은 성공했고 반은 실패했다.
어느 날 출근하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팀장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장실로 가더니,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회사 내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케 했다. 그 소문은 곧 내 귀에도 들어왔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사장님은 천천히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오랜 기간 회사를 다닌 직원들이 나와 사장님을 배웅했고 일부 직원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사장님은 7년간 함께한 회사를 떠났다.
그 후로 사장님은 미국에 있는 본사에 가서 감사를 받고 해명도 한 후, 자택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주일, 이주일, 그리고 한 달 반이 지난 어느 날, 사장님의 해임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만일 해외 본사에서 키워진 인재라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른 국가의 지사장으로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선택받은 인재가 아니었다.
두 임원의 난 이후사장 자리는 일 년 이상 공백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그들은,사장은 쫓아냈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인덕을 쌓지 못해 직원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고, 본사의 인정을 받을 만큼 실적이 좋지도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호랑이가 나간 굴에서 대장 행세를 하는 늑대들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사내를 돌아다녔다.
해임된 사장님은오래 지나지 않아 다른 회사로 이직하였다고 한다. 내가 나올 때까지 보직의 변동이 없었던 두 임원들은, 쿠데타 이후 자신들이 원하던 가치를 찾았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