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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글 Dec 05. 2022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운동회 시즌만 되면 주목을 받았던 나는 운동을 싫어하는 30대 여성이 되었다. 그 중 단거리 달리기는 나의 주 종목이었다. 어릴 때 엄마의 심부름을 부탁 받을 때면 우리 집 초록색 대문쯤에 내가 섰고 오빠는 나이가 많고 남자라는 이유로 저 멀리 골목 끝에 섰다. 오빠가 준비, 땅 하면 경주마처럼 소리를 지르며 반대쪽 골목 끝을 향해 냅다 달렸다. 대체 소리는 왜 질렀을까. 덕분에 학창 시절 12년 내내 계주 선수로 뽑히지 않은 적이 없다. 주목 받는 것이 싫어 달리기를 못하는 척도 해봤다. 하지만 땅! 소리만 들리면 내 발은 자동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나의 계주 인생 시작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빠른 연생’이 존재하던 시기였기에 나는 일곱 살 이었다. 청백 계주는 저학년에서 고학년 순으로 뛰었다. 나는 1학년이었기에 청백 계주의 스타트를 알리는 선수였다. 전 학년이 보는 앞에서 스타트를 뛰는 기분이란 짜릿하면서도 내 가방보다 작은 어깨를 묵직하게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한 학년에 다섯 반도 안 되는 작은 학교였는데 그리 작은 학교에서 운동회 리허설을 두어 번 정도나 했다. 그래서 나는 계주 연습을 두어 번 해야 했는데 매번 상대 팀 친구보다 뒤처졌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이를 악물고 뛰어도 어느 순간 내 눈앞에 상대 팀 친구의 뒤통수가 보였다. 두 번 정도 상대에게 지고 나니 이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원인 분석에 나섰다. 윗 학년에게 달리기도 전부터 지고 있는 경기를 이어주고 싶지 않았다. 잘 달리는 언니 오빠들을 관찰했다. 신발을 벗고 뛰기도 했고, 축구화 같은 날렵해 보이는 운동화를 신고 달렸다. 고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 법이지만 난 고수가 아니었기에 장비 탓이라도 해야 했다.


“엄마, 아무래도 운동화가 커서 잘 못 달리는 것 같아.”


 엄마는 나와 함께 신발장을 열고 적당한 운동화를 찾아주었다. 작년에 신다가 작아져서 신지 않는 빨간색 찍찍이 운동화를 찾았다. 조심스레 발을 운동화에 꾸겨 넣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해봤다. 신발이 내 발에 착 감기는 느낌이 나에게 승리의 여신이 찾아올 것 같았다.


 운동회 당일이었다.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스타트라인에 섰다. 마치 국가대표처럼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누가 툭 하고 치면 울 것 같았다. 뒤에선 나의 이름을 외치는 친구들의 함성이 점점 멀어졌다. 스타트 라인에서 엉덩이를 빼고 자세를 낮추고 있으면 어느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슴에 있어야 할 심장이 이상하게 머리에서 쿵쾅댔다. 선생님이 휘슬 부는 소리를 기다리며 이 순간이 부디 빨리 지나가길 기도했다.


“삑-”


 체육 선생님의 깃발이 내려감과 동시에 나는 코뿔소처럼 머리부터 앞으로 내밀며 질주해 나갔다. 이번엔 부디 친구의 뒤통수가 보이지 않길 바랐다. 아직 보이지 않았다. 탁, 탁, 탁. 달리다 보면 이 세상에, 이 지구에 오직 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내 숨소리와 내 발 소리만 들렸다. 환호하는 친구들 소리도, 박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터질 듯이 뛰던 심장 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의식하지 않아도 내 발은 있는 힘껏 운동장 바닥을 밀어내고 있었다. 달리기의 무아지경에 다다를 때쯤 모자이크 처리된 것처럼 뭉개져 보이는 군중들 사이에서 엄마의 얼굴이 스치듯이 지나갔다. 나의 이름을 외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다!’


 더 빨리 뛰었다. 이 정도 달렸으면 힘이 빠져야 할 다리에서 갑자기 힘이 생겼다. 이대로라면 지구 한 바퀴는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서 이 부담스러운 달리기를 끝내고 엄마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분명 나의 차례만 보고 휘리릭 가버릴 엄마였다. 엄마를 붙잡기 위해서라도 나는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멀리서 나의 바통을 기다리고 있는 2학년 언니가 보였다. 계주에선 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바통을 건네주는 것이다. 나는 끝까지 페이스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다음 타자가 알아서 나의 페이스에 맞춰 달리며 바통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서 순위가 바뀌곤 한다. 무사히 나는 2학년 언니에게 바통을 넘겨줬다. 그 뒤로 경기는 쳐다 보지도 않고 엄마를 찾았다. 청팀이 우승하던 백팀이 우승하던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나 하나 잘 뛰었으면 된 것이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달리는 동안 친구의 뒤통수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줄곧 앞서서 달렸던 것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기쁨을 얼른 엄마에게 달려가 전해주고 싶었다. 엄마는 내가 친구들의 환호를 충분히 만끽하고 나서야 나타났다.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잘했다며 엉덩이를 두들겼다. 나는 마치 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신이 나서 나만의 역전극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엄마는 나의 무용담을 들으며 가방에서 주섬주섬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말은 김밥을 나에게 줬다. 그리고 친구들 틈에 섞인 내가 형형색색 예쁘게 말아져 있는 김밥을 보고 눈이 동그래진 것을 보고 나서야 엄마는 안심을 하고 등을 돌린다.  


“엄마 다시 가야해, 괜찮지?”


 괜찮지 않아도 늘 괜찮다고 말해야 했다. 그래야 엄마가 웃었다. 아마도 하기 싫은 달리기를 했던 건 엄마를 보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겠다. 머리가 크고 나선 잦은 엄마의 부재를 종종 내 실패의 변명 거리로 삼고 안주거리로 삼았다. 언제나 내 상처만 아팠다. 할 일 없는 아침에 ‘싫지만 가성비 좋은 운동이니 어쩔 수 없지’ 라고 투덜거리며 런데이어플을 켜고 성북천을 살금살금 달리다 보면 엄마가 생각난다. 늦었지만 이제서야 덜 이기적인 생각을 해본다. 딸에게 새 신을 사주지 못하고 낡아버린 운동화를 신겨야 했던 엄마를. 젖을 채 다 물리기도 전 이웃집에 딸을 맡기고 일을 나서는 젊은 날의 엄마를. 지문이 닳다 못해 없어져 공항에선 항상 입국심사가 지체되는 엄마를. 어느 날 공장기계에 잘려 나간 엄마의 네 번째 손가락 살점을 이제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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