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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hayn May 09. 2022

안규철의 놀이터

미술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어요. 그런데 미술이 없는 도시를 상상해보면, 그게 감옥과 뭐가 다를까요? 우리에겐 지금 여기 없는 것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고, 저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독려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안규철 작가는 본인의 말처럼 상상을 멈추지 않았다. 90년대 초 이래 언어와 안경, 망치와 같은 일상 물건을 소재로 작업해온 그는 종종 개념미술 작가로 분류되곤 하지만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닌 언어로 표현되는 말과 대상 사이의 구조에 관심을 갖는다. 또한, 그의 작업 스펙트럼은 하나의 개념미술로 규정되기엔 넓고 풍부하다. 장르의 구분뿐만 아니라 미술과 비 미술의 구분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며 섬세한 시선으로 사회가 놓치고 있는 것, 외면받고 있는 것들을 포착하고 예술로 환기하고자 한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후 중앙일보 ≪계간미술≫의 기자로 일한 안규철은 조각가이자 글을 쓰는 기자이자 저자였다. 그는 ‘만들기’ 못지않게 ‘쓰기’를 많이 한다. 많은 드로잉에 그림과 함께 그의 작품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는, 마치 지시문 같은 글을 서술한다. 안규철에게 작업은 일종의 언술행위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그의 천성적인 천연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의 언어 체계 안에서 유희하며 개인의 내부에서 외부로, 미술계 외부에서 내부로 말을 건넨다. 그에게 미술은 열린 기호다. 글과 오브제, 공간 사이의 연결성이 상생하거나 모순 하며 기표로 작용한다. 작가의 주된 관심사는 기표 자체보다 기호들 간의 상호 작용이다. 


기억의 벽, 2015 /안경, 1991


‘그는 사물을 약간 변형함으로써 기능이 상실됨을 암시하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든다. 그의 목표는 아주 명료하다. 이 익숙하기 짝이 없는 사물의 일상적인 흐름을 눈에 보이고 경험할 수 있는 무엇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일상 물건의 상식적인 기능을 제거함으로써 의미의 새로운 층계를 만든다. 안경은 일상생활에서 너무도 익숙한 물건이지만 안규철의 <안경>은 어딘가 어색하다. 다섯 개의 렌즈가 나란히 결합한 <안경>은 익숙한 일상의 물건을 떠나 생경한 느낌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죄’라는 기호가 쓰인 솔은 원래 닦아내는 용도이다. <죄 많은 솔>은 기호와 기능이 충돌하며 ‘솔'의 본래 기의를 상실하게 한다. <2/3 사회>의 구두는 앞뒤가 연결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단결, 권력, 자유>의 코트는 한벌 마냥 붙어버려 옷걸이에 걸려있을 뿐이다. 특히 이 작품 제목의 ‘권력’은 독일어 ‘만든다macht’로 읽을 수도 있어 ‘단결은 자유를 만든다'라는 뜻의 문장이 되기도 한다. 익숙한 하나의 대상은 안규철의 랑그langue에서 저마다의 발화Parole를 드러낸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1992 /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1994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는 이항대립을 이루는데, 작품 내부에서도 그러한 대립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전자에서는 회전하는 기계장치에 의해 반복 운동을 하는 쇠망치가 책상에 ‘그렇다Ja’를 계속 찍어낸다. 무심하게 계속되는 망치질이 거친 소리와 둔탁한 울림을 만들며 긍정적 단어 'Ja'와 이질감을 이룬다. ‘그렇다'는 보편적인 기의signifié를 잃고 폭력적인 기표signifiant로서 작용한다. 후자의 드로잉에서 사람은 멍에와 같은 커다란 롤러를 이고 나아간다. 롤러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니다Nein'가 새겨진다. 수십개의 부정의 단어를 남긴 롤러는 모나지 않은 굴레를 쫓아 쉼없이 굴러간다. 롤러는 계속해서 부정의 기표로 긍정의 기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안규철이 만들어낸 체계 안에서 ‘그렇다'와 ‘아니다'는 차이를 만들며 의미를 생산한다. 차이를 바탕으로 한 선택과 결합을 통해 두 단어는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먼곳의 물, 1991


일상의 사물뿐만 아니라 생물도 그의 관심사였다. 1991년과 2015년, 14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금붕어를 주제로 한 두 작품을 발표한다. <먼 곳의 물>의 금붕어들은 하얀 테이블보에 수놓아져 실물 형태의 물이 든 사발로 모여드는 모양을 하고 있다. 테이블 위에 같이 놓여 있지만, 금붕어의 체계와 사발의 체계는 다른 층위를 이루기 때문에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다.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에 있는 것이다.    



아홉 마리 금붕어, 2015


<아홉 마리 금붕어>에서는 살아있는 금붕어들을 원형 수조에 담아 먼 곳에 있던 두 존재, 물과 금붕어의 불가능할 것만 같던 조우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평행한 아홉 개의 레일이 금붕어들 사이를 가로질러 이들은 결코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불가능한 상황으로 회귀한 것이다. 이들은 같은 체계상에 존재하지만,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분할된 영역을 배회할 뿐이다. 아홉 마리의 금붕어들은 각각 스스로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게 되었다. 두 작품은 같은 기표 ‘금붕어'에서 시작하지만 테이블보에 수를 놓거나 생물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다르게 표현되었다. 그러면서 두 작품은 결국 도달할 수 없는, 가깝고도 먼 곳을 응시하며 무력감을 드러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다른 형태이지만 개념적으로 연결되어 유사한 기의를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집과 방이라는 공간적 주제로도 꾸준히 변주를 이어왔다. 집을 구성하는 ‘벽’과 ‘문’은 양가성을 가진다. 벽은 내부와 외부를 가르고 외부의 위협들로부터 내부를 보호하면서도 외부로부터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양상을 띤다. 문은 벽의 양가성을 상쇄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양가성을 확립한다. 벽의 단절을 해체하여 내/외부의 고립을 중립화하면서 문의 여닫음을 통해 주체적인 역할을 갖게 된다. 작가는 대립적 소재를 구조화하여 교차하는 맥락을 만들고 관람객에게 작품의 의미를 결정할 수 있는, 작품 속에서 발화할 수 있는 선택권을 선사했다. 작가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가 만든 랑그의 작동을 관람하는 관람자가 된다. <49개의 방>은 견고한 나무 구조물과 문들이 닫힌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바닥없는 방>은 조명과 집기류 등 완전해 보이는 집이지만 딛고 서는 바닥과 땅의 부재로 묘한 허전함과 상실감을 느끼게 한다. 공간에 당연히 전제되었던 것을 제거하며 만드는 차이가 의미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버린 문들>과 <타인들의 방>은 기능을 다 한 레디메이드 문들을 수집해 무질서해지기만 하던 엔트로피의 방향을 작가 앞으로 불러세웠다. <64개의 방>그림8은 검푸른 벨벳으로 64개의 공간을 나누었다. 견고한 벽과 나무에서 부드러운 커튼으로의 전환은 구획된 공간이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의미한다.  


49개의 방, 2004 / 64개의 방, 2015


글쓰기는 그의 발화 방식이자 그의 미술이다. 그는 사적인 글쓰기를 대담하게 확대했다. <1,000명의 책>은 사전 신청을 한 1,000명의 관객을 전시장 내의 작은 방으로 초대해 문학작품의 필사를 이어나가게 한다. 국내외 명작들이 참가자들의 손글씨로 다시 쓰이는 동안 작품은 본래의 것에서 해체되어 새로운 기의로 탄생한다. 필사하는 작은 방에서 주어진 1시간 동안 글쓰기 행위를 가장한 수련 행위가 일어나고 관객에게 기호의 해독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한다. 관객들이 만든 1,000시간은 기표를 축적하고 무한한 기의의 통로를 만들어버린다. 필사 작업보다 비교적 느슨하고 열려있는 <기억의 벽> 역시 다수의 참여로 완성된다. 5개월 동안 진행되는 이 프로젝트는 작가가 주문한 ‘우리가 잃어버린 것, 그리워하는 것, 부재한 것’의 이름들을 적은 메모지로 전시장 벽면을 채우는 연속적인 작업이다. 발화된 개인의 기억은 망각의 위기를 극복하고 응집되어 거대한 서사의 체계를 만들며 부재와 존재 사이의 틈을 좁힌다.


안규철은 말한다. “보는 것을 믿지 말라." 즉, 감각되는 표상을 믿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의 의심은 글이 되고, 섬세한 글쓰기는 숨겨졌던 전체를 노출하고 그것의 구조를 인식하게 한다. 글쓰기는 그를 통해 자유로운 상상을 하게하고 상상은 놀이가 되어 작품에서 구현된다. 그의 놀이터에는 경계가 없다. 글이 창조한 세계에서 기표들은 아이들처럼 순진하고 부주의하며 소홀하게 충돌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기존의 랑그는 놀이를 통해 해체되고 작가의 질서를 부여받은 새로운 층계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참고문헌

김정아, [interview] 지금 여기 없는 것을 상상하기, 미술세계, 2017.3, 58p.

윤난지, [1990년대를 만든 작가들]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안규철의 사물극, 월간미술, 2020.9, 68p.

보리스 그로이스, [무한한 현존], 안규철,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국립현대미술관, 2015,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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