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하다.

by 최미야

딸이 잘 자라고 있어서 족하고, 내 몸이 건강해서 족하고, 또 새 하루에 눈을 뜰 수 있음에 족하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족하다. 사고 싶은 옷을 살 수 있어서 족하다. 족한 것은 많다. 찾아보면 정말 많다. 만나고 싶은 사람과 언제든지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어서,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어서, 읽고 싶은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걷고 싶을 때 얼마든지 내 두 다리를 움직여 걸을 수 있어서 족하다. 족함에 감사하다. 냉소가 싫다. 조소도 싫다. 허무주의도 싫다. 비관도 싫다. 나는 일희일비하지만 결국은 낙관론자다. 흐린 하늘에 비가 떨어질 것 같아 족하다. 꽃샘추위가 몰려오지만 따뜻한 옷으로 감쌀 수 있어서 족하다. 족한 것 천지다. 면접 교섭 때문에 딸이 와 있다. 딸은 꼭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엄마 사랑해요" 하고 애교를 부린다. 난 그 모습을 볼 때 뿌듯하고 내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 차는 느낌을 받는다. 그 애가 잠에 빠져들 때,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달콤한 꿈나라로 가는 그 모습은 마치 천사. 양 볼에 뽀뽀를 해 주고 나도 그 옆에 눕는다. 사랑한다. 내 딸을. "엄마는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었으니까, 하늘나라로 먼저 가는 게 아니야?" 하고 속삭이던 그 애의 눈에서 눈물이 맺혔다. "엄마도 눈물 나?" "아니, 엄마는 이미 많이 울어서 눈물 안 나." 일곱 살, 죽음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이른 시기. 그 애는 자기 전 항상 하늘나라 이야기를 한다. 꼭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같이 하늘나라로 갈 거라고 하는 그 애. 너무나 순수하고 예뻐서 눈물이 나는 그 애. 그런 애가 내 딸이다.


어제 아는 언니와 통화를 하다가 문득 남자 이야기가 나왔다. 언니는 남자와 어느 정도 말이 통해야 만날 수 있다고 했고, 간절히 남자 친구가 생기길 바라고 있었다. 난 남자와 말이 통하는 걸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살면서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그저 그 사람이 날 좋아해서 맞춰줬던 것뿐, 영혼으로 교감되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나에게 의지한다. 온전히 나는 나에게 의지하고 나를 믿는다. 나는 딸 말고는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내게 사랑은 곧 딸이고 딸이 사랑이다. 그 외의 존재에게서 나는 딸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내게 유일한 사랑은 딸이다. 그 어떤 남자도, 친구도, 심지어 부모조차도 내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할 수가 없다. 난 그 사실이 좌절스럽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거라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랑스럽다. 내 사랑은 온전히 내 딸만이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내가 사는 지역이 이번 산불 난 곳과 가까워서 어제는 화재 연기로 대기가 아주 뿌옇고 더러웠다. 나는 간절히 비가 오길 바랐지만 오늘 비는 단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다. 야속한 하늘. 얼른 산불이 완전 진화되고 화마를 입은 민가와 산림이 속히 복구되길 바라 본다. 너무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 맘카페에서는 얼른 짐을 싸 놔야겠다며 설레발을 떠는 사람, 구호 물품을 보내자고 독려하는 사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마구 글을 올렸다. 나는 조용히 그 글들을 읽으며 잠자코 있었다. 서울에서는 그 난리를 치고 있고... 또 치명적 인재들은 반복되고 있다. 나라가 어수선하다. 어서 탄핵이 완료되고 장미 대선이 치러졌으면 좋겠다. 군통수권자가 그 짓을 한 데 대해서 찬성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족한 하루하루들이지만 나라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면 조금 답답하긴 하다. 얼른 시원하게 비나 내렸으면. 탄핵이 조속히 마무리됐으면. 더 족하겠다.


여름 옷 쇼핑을 했다. 크롭 티셔츠 여덟 벌과 가디건 한 벌, 원피스 다섯 벌을 샀다. 오늘부터 또다시 1일 1식 시작이다. 예쁘고 작고 부드러운 옷을 입으려면 거기에 몸을 맞춰야 한다. 강박적이라는 건 알지만 옷 입는 걸 포기 못하겠다. 1일 1식은 전혀 힘든 일이 아니다. 충분히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이다. 작년 여름 10kg을 빼고 또다시 6kg이 쪘다. 근데 별로 짜증나거나 하진 않는다. 옷은 다 들어가고, 뱃살이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그리 못 봐 줄 몸은 아니라서. 다만 여름에 내 맘대로 옷을 입고 다니려면 살은 무조건 더 빼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군살이 늘었다. 기미도 늘었다. 요즘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양제를 먹는다. 종합비타민이다. 기미 잡티가 좀 덜해지기를, 피로가 가시기를 기대해 본다. 얼른 덥고 땀 나는 여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올해는 행복할 것 같다. 공부할 수 있어서, 자유로울 수 있어서.


그래, 자유로울 수 있어서 족하다. 운신의 자유가, 생각의 자유가 있어서 족하다. 딸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약을 먹고 내 병을 조절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족하다. 살아 있음에, 죽어감에, 딸이 말하는 그 하늘나라로의 여행길에, 잠시나마 행복감들을 느낄 수 있음에, 족하다. 나는 본(本)으로 돌아간다, 항상. 삶과 죽음, 그 문제로 돌아간다. 깔깔거리며 친구와 수다를 떨 때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나는 항상 그 길로 돌아간다. 귀로에 서서, 나는 죽음을 생각한다. 생을 생각한다. 내 생뿐만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 던져 놓은 그 작은 생도 생각한다. 스치는 인연들, 시절인연들, 모든 인연에 감사하다. 남을 시기하지 아니하고, 남을 미워하지 아니하고, 비교하지도 아니한다. 내 태대로, 내 모양대로, 내 난 대로의 삶에, 생에 족하다. 난 예전보다 말수가 적어졌고, 자주 웃게 되었다. 전부터 웃음은 많았지만 더 많아졌다. 항상 웃는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꼴이든 내 모습 그대로 족하기 때문이다.


딸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더니 소불고기를 먹고 있다며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딸은 소불고기에 시선이 꽂혀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웃음). 내일모레면 또 딸을 본다. 딸을 데리고 아는 애 엄마와 함께 롤러장에 놀러 가기로 했다. 신나서 영상에 딸의 모습을 담을 생각에 행복하다. 오히려 딸과 떨어져 있음에 족하다. 전남편에게 감사하다. 그냥 모든 상황에 족하다. 이렇게 별일 없이 사는 게 대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조증이 재발되지 않고 잠잠해서, 잠을 잘 잘 수 있어서, 아는 언니와 몇 시간 동안 통화를 할 수 있어서,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입가에는 웃음이 번지고 있다. 마흔하나의 나는 많이 평온해졌다. 폭풍같던 삼십 대를 지나고 나니 정말 부드러운 풀밭으로 던져진 걸까. 세찬 강물을 건넌 걸까. 난 다 건너온 걸까. 설마. 앞으로 또 많고 많은 세찬 강물들이 내 앞을 가로막겠지만, 난 기어코 그 강물을 건너고 말 거다. 내 튼튼한 두 다리로 성큼성큼 나아갈 것이다. 생은 어쩌면 너무나 쉬운 것이다. 그냥 생 자체에 족하면 된다. 당신의 꼴에, 당신의 태(态)에, 당신의 모양에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비교할 덜덜 마시라.

생은 감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

각자의 우주는 각자의 우주만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

족하라.

마음껏 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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