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고3 맘> -공동육아

무덤에서 놀던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

by 물푸레나무 식탁

나의 열두 살, 내가 다니고 싶은 학교를 만난 곳은 TV에서였다. 영국에 있다는 썸머힐 학교, 사계절 자연에서 놀고, 통나무집을 만들고, 요리를 하고, 하고 싶을 때 원하는 공부를 하는 아이들을 보고 여기가 아니라 저기였다면 나는 지금 보다 백 배는 더 행복했을 텐데, 내가 만약 아이를 낳으면 나는 꼭 저렇게 키우리라. 네모난 교실에 네모난 책상에서만 하는 공부는 시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열두 살에.


내가 무슨 서울 한복판 강남 8 학군 어린이였다면 학업 스트레스로 많이 지쳐 있었나 보다 싶었겠지만 내가 사는 곳은 이렇다 할 보습 학원도 없는 서울 변두리였다. 그저 그런 학구열을 지닌 부모님과 고만고만한 애들이 겨우 피아노 학원이나 다니던 곳이었다. 등수가 매겨진 성적표가 나오지도 않고, 수우미양가 성적표가 평가의 전부였는데 나는 왜 TV 속 썸머힐 아이들을 그렇게 부러워했던 것일까. 내게 매력적인 내레이션은 이런 거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루를 보내고, 자기의 하루를 계획할 수 있다. 자기가 정말 하고 싶어 하는 공부가 생기면 하면 된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산다.' 이런 세상이 있다면 나는 그곳에서 꼭 살고 싶었다.


아이의 첫 교육기관을 정할 때, 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했다. 남편 회사에 있는 어린이집과 글로벌 시민의 필수 요소인 언어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영어 유치원, 종교적 염원인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 대안적인 교육방법을 고민하는 발도르프나 숲, 공동육아 어린이 집 등을 놓고 고민했다. 다양한 교육 기관의 무수한 장점과 단점 사이를 견줘보며 나는 내가 열두 살에 본 썸머힐 같은 곳을 찾고 있었다. 자연 속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찾는 곳이 있다면 거기서 시작하고 싶었다. 내가 본 썸머힐이 진짜 그런 곳인지 내가 찾는 곳이 한국에 있긴 있는 곳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찾은 공동육아가 그게 걸맞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이 아이를 공교육이 아닌 대안교육을 하며 키우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받은 공교육이 완벽하지 않았다면 답은 대안교육에 있는 게 아닐까?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다.


아이는 공동육아 어린이 집에서 5,6,7세를 보냈다.

선생님 한 명에 아이 5-6명을 보육하는 곳,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밖에 운영하지 않지만 보육 시간이 짧은 만큼 아이들에게는 큰 스트레스가 없는 곳(아이들은 그저 어린이집에서 신나게 놀다 오면 된다), 한글 영어 학습을 하지 않는 곳. 부모들이 함께 운영해 어린이집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곳, 다양한 가족 행사로 엄마아빠 외에 다른 어른들과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곳. 매일매일 마당과 뒷산에서 뛰어노는 곳, 하원시간에 흙먼지를 잔뜩 뒤집 쓰고 와 오늘 하루도 정말 즐거웠다고 얘기하며 잠드는 곳.


대중교통도 닿지 않는 경기 북부에 단층 주택을 개조한 어린이집은 나지막한 언덕 아래 있었다. 매일 아침 간식을 먹고 언덕을 오르면 무덤이 있었고, 양지바른 무덤가 앞에서 아이들은 계절별로 잡초와 냉이 쑥을 뜯고, 개나리와 진달래 산수유와 앵두, 버찌를 따며 놀았다. 날이 좋으면 도로를 따라 축사가 있는 농장에 가서 젖소들을 한참 보고, 아빠들이 청소해 둔 마당 모래놀이터에서 드러누워 놀고 싶은 만큼 노는 게 아이의 일과였다. 어린이집에서 전자기 게임 같은 것은 할 수도 없고, TV도 없다. 실뜨기와 딱지치기 같은 전통 놀잇감으로 놀고, 특별한 장난감이 없다 보니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별별 장난감을 다 만들어 놀곤 했다. 텃밭에 채소를 기르고, 겨울엔 마당에 얼음을 얼려 썰매를 타고 놀았다. 동네 놀이터에서 제일 신나게 노는 아이는 우리 어린이집 아이들이었고, 7살까지 글자를 몰라도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6살에 글자를 읽어도, 7살에 글자를 몰라도 6살짜리가 7살짜리 책을 읽어주고, 대신 글씨를 써줘도 자기의 속도로 배우며 자라는 곳이었다.

다행히 그때는 5세 고시, 7세 고시를 보는 시대가 아니었다. 무덤 앞에서 뛰놀기만 했어도 집 앞 초등학교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 줄 아는 아이는 학교 생활 역시 재미있고, 늘 새로운 것을 배우는 모험과 신비가 가득 찬 곳이었다. 다행히 학교 공부는 어렵지 않았고, 나는 이 애가 첫 아이라 얼마나 미리미리 공부를 해둬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2/3 이상이 영어유치원을 다녔거나 해외체류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무덤가에서 사교육 하나 없이 행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에게 특별히 영어로 공도 안 들였기에 초중고등 학교를 올라가면서 나는 늘 영어유치원을 보내지 않은 나 자신을 후회했다. 그때, 영어유치원을 보냈으면 다르지 않았을까? 그때, 영어유치원만 보냈다면 지금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었을까? 나의 반골기질 때문에 아이를 더 힘들게 한 게 아니었을까? 왜 나는 남들이 가라고 하는 길을 늘 삐뚜름하게 바라보며 다른 해답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나의 잘못된 선택이 아이를 힘들게 했을 수도 있었다는 후회가 들 때,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영어 유치원을 다녔다면, 지금 더 쉽지 않았을까?”

“아니,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어.”

아이는 늘 단호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영어 선행을 끝내고, 수학 선행을 제때에 시작하지 못했다는 엄마의 후회와 상관없이 아이의 대답은 늘 같았다. 아이는 어린이 집에서 사랑과 존중을 가득 받고 자랐다.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대안교육을 계속 이어나가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그때 신나게 놀아본 경험들, 사랑받고, 존중받는 어린이의 자신감을 무럭무럭 키우며 자랐다.


조합원으로 어린이집을 3년 동안 운영하며 나 또한 조금은 어른이 될 수 있었다. 내 아이밖에 모르고, 내 아이 하나 밖에 키울 줄 모르는 내게 함께 자라고 크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육아 동지들을 만나게 해 준 곳도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였다. 정답이 없는 육아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함께 키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가. 5살에 만난 육아 동지들은 아이가 18살이 된 지금도 만나며 아이의 사춘기와 입시를 함께 겪는 지금까지도 서로를 든든히 지켜준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가족처럼 아이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보잘것 없는 나의 뒷배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고민하는 부모님들이 계신다면

5세 고시와 7세 고시를 고민하는 분이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고민하지는 않겠지만 이곳은 아이를 어떻게 공부시킬까 고민하는 곳이 아닙니다. 집 다음으로 아이들이 사랑받고 행복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인생에서 이렇게 오직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기 위해서 고민을 할 수 있는 시절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고3 아이는 그 시절 아주 진하게 행복했다고, 우리는 그때 얘기를 하며 지금을 버틸 힘을 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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