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단순하지 않다
자유는 단순하지 않다
기독교 신앙은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할지 선택할 자유를 제한하여 개인의 성장과 잠재력을 가로막는다고들 넘겨짚는다. 임마누엘 칸트는 권위나 전통보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에 의지하는 것을 계몽된 인간의 조건으로 꼽았다. 윤리적인 문제들에서 권위에 저항하는 이런 마음가짐은 이제 현대 문화의 커다란 흐름이 되었다. 스스로의 윤리적인 기준을 설정하는 자유는 온전한 인간이 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필수 요건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발상이다. 자유는 오로지 구속과 제한이 없다는 식의 부정적인 낱말들만을 엮어서 정의할 수 없다. 실제로 구속과 제한이 자유의 통로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음악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면, 몇 년이고 피아노를 치고 치고 또 치면서 연습을 거듭해야 할지 모른다. 이는 자유를 구속하고 행위다. 이처럼 훈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허다하다. 하지만 달란트를 지닌 이들에게 이런 규율과 제한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묻혀 버릴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다른 일들을 성취하는 더 풍성한 자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기 위해 특정한 일을 하는 자유를 일부러 포기한 것이 아닌가?
구속과 훈육, 제한 따위가 본질적으로, 그래서 자동적으로 인간을 자유로워지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키가 165센티미터쯤 되고 몸무게는 57킬로그램 정도 나가는 젊은이는 프로 아메리칸 풋볼 팀에 들어가겠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아무리 공들여 훈련하고 노력한다 해도 결국 낙담하고 으스러질(말 그대로)게 뻔하다. 젊은이는 신체적인 현실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그저 잠재력을 갖지 못한 탓이나. 우리 사회에는 달란트와 관심 영역에 맞는 일이 아니라 더 많은 보수를 보장하는 직업을 기를 쓰고 구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일들이야말로 마침내는 우리를 억압하고 비인간화하는 속박이다.
그렇다면 규율과 제한은 우리의 본성과 능력의 현실에 맞을 때만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물고기는 공기가 아니라 물에서 산소를 흡수하므로 만일 그것이 물론 제한되고 한정될 때만 자유롭다. 만일 우리가 물고기를 풀 위에 꺼내 놓으면 물고기의 자유는 물론 생존마저도 강화되는 게 아니라 파괴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본질적인 현실을 존중하지 않으면 물고기는 죽고 만다.
삶의 여러 영역에서 자유는 제약을 없애는 게 아니라 올바른 한계, 다시 말해 자유를 불러오는 구속을 찾아내는 쪽에 더 가깝다. 인간 본성과 세상의 실상에 잘 부합되는 구속은 더 큰 힘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 그리고 더 깊은 기쁨과 만족을 낳는다. 실험과 모험, 실수는 시간이 갈수록 능력뿐만 아니라 한계까지 명확히 드러내는 경우에만 성장을 불러온다. 합당한 제한이 지적, 직업적, 신체적 성장을 뒷받침한다면 영적이고 도덕적인 영역에서도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영적인 실재를 만들어 낼 자유를 부르짖을 게 아니라 그런 존재를 찾아내고 거기에 맞춰 살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저마다 알아서 윤리적인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는 통념은 영적인 영역과 나머지 세계는 완전히 딴판이라는 전제를 바닥에 깔고 있다. 정말 그렇게 믿는 이들이 있을까? 한동안,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주일마다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마친 뒤에 그 자리에 남아 몇 시간씩 현장에서 나오는 질문들을 받았다. 수백 명이 넘는 이들이 예배당을 떠나지 않고 토론을 벌였다. 거기서 자주 나오는 얘기가 있었다. "옳고 그름은 저마다 알아서 규정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곧장 대꾸하지 않고 되묻곤 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해선 안 될 일을 저지르고 있는 이들이 지금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보십니까? 당사자들이 스스로의 행동을 옳다고 여기는지를 떠나서 말입니다." 어김없이 "있겠죠, 있고말고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럼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어떠하든 반드시 따라야 할 도덕적 실재가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거기'에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 아닐까요?" 생각이 많아졌든 심통이 났든, 아무튼 이 질문 뒤에는 거의 늘 침묵이 따르곤 한다 (91-93).
팀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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