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
사랑하는 관계가 건강하려면 서로 독립성을 잃어야 한다. 어느 한편만 그래서는 안 된다. 양쪽 다 서로에게 말해야 한다. "그대에게 맞추겠습니다. 내가 달라질게요. 나를 희생해서라도 그대를 섬기겠어요." 한쪽은 철저하게 헌신하고 베푸는 반면, 다른 한쪽은 명령하고 받기만 한다면 착취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양쪽 모두를 억압하고 왜곡하게 될 것이다.
언뜻 보면, 신과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비인간적이다. 일방적, 그러니까 신 쪽의 일방통행이어야 한다. 거룩한 존재인 신은 모든 권능을 거머쥐고 있다. 인간은 신에게 맞춰야 한다. 신이 인간 편에 적응하고 섬긴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다른 종교, 또는 다른 신앙 형태에서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기독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육신과 대속사역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맞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 고통을 겪고 죽음을 당할 만큼 연약한 존재가 되었다. 십자가에 달려 인간의 한계(죄인이라는)를 받아들였으며 인류를 용서하기 위해 대신 죽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한없이 심오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너희들에게 맞추마. 내가 달라지겠다. 나를 희생해서라도 너희들을 섬기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똑같이 고백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적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 5:14).
한 번은 어떤 친구가 C. S. 루이스에게 물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게 쉬운 일인가?" 루이스는 대꾸했다. "사랑하고 있는 이들에겐 쉽지."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를 기쁘게 해 주고 싶게 마련이다. 누가 나서서 부탁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든 다 해 주려 한다. 상대를 즐겁게 해 줄 일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연구하고 공부한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그 일을 한다. 돈이 들고 큰 불편이 따르더라도 기꺼이 감수한다. "말만 해요, 바라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겉만 보고 어안이 벙벙해진 친구는 '완전히 코가 꿰이었군'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랑에 빠진 당사자의 속마음은 천국이 따로 없다.
크리스천과 예수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크리스천을 구속한다. 예수님이 어떻게 스스로를 변화시켜 자신을 주셨는지 알고 나면, 두려움 없이 자유를 포기하고 그분 안에서 참다운 자유를 찾아 누리게 된다 (95-97).
팀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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