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성자들을 늘어놓은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치료하는 병원이다
성격적인 결함
교회 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얼마 가지 않아 어김없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보통 크리스천들의 성품에 수많은 결함이 있음을 알게 된다. 다른 자발적인 조직들에 비해 도리어 교회 쪽에 다툼과 분파주의가 더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 지도자들의 도덕적인 타락상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현실이다. 언론 매체들이 그런 모습을 들춰내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없는 일을 지어낸 건 분명 아니지 않은가! 교회를 이끌어 가는 리더들은 대체로 세상의 지도자들만큼이나 (더한 경우도 많지만) 부패한 듯 하다.
반면에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지만 윤리적으로 본보기가 될 만한 삶을 사는 이들도 숱하다.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그대로라면, 전반적으로는 크리스천들이 나머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가정은 실제로 기독교가 스스로에 관해 가르치는 바에 관한 그릇된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기독교 신학은 흔히 '일반은총'이라고 부르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
야고보서 1장 17절은 말한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선하고 슬기로우며 정의롭고 아름다운 일은 누가 하든 하나같이 하나님이 그럴 힘을 주셨다는 뜻이다. 그분은 지혜와 재주, 아름다움과 솜씨 같은 근사한 선물들을 '은혜로', 다시 말해 우리 공로와는 아무 상관없이 베풀어 주신다. 신앙적인 확신, 인종, 성별, 또는 세상을 풍요롭고 밝게 하거나 지키는 데 기여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인류에게 무차별적으로 허락하신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학은 참다운 크리스천들이 지닌 성격 결함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지적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에 기대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게 성경의 핵심 메시지다. 도덕적인 노력은 구원의 자격이 되기에는 너무 미미하며 그릇된 동기일 뿐이다. 예수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베풀었고 인간은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로 그 구원을 받는 게 전부다. 교회는 어떤 형태로든 이러한 사실을 믿는다.
성품이 성숙해지고 행동이 변하는 것은 크리스천이 된 뒤에 차츰차츰 일어나는 과정이다.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을 갖추려면 반드시 '깨끗해져야' 한다는 그릇된 믿음은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아쉬운 노릇이긴 하지만, 이는 정서적으로,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아직 갈 길이 먼 미숙하고 연약한 인간들이 교회에 가득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흔히 하는 말마따나, "교회는 성자들을 늘어놓은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치료하는 병원이다."
훌륭한 성품은 주로 사랑이 넘치며 안전하고 안정된 가정과 사회 환경(우리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조건들이 아니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불안정한 가정 여건, 형편없는 롤 모델, 그리고 비참하고 실망스러운 역사를 지닌 이들이 허다한 게 현실이다. 이들은 결국 깊은 불안과 과민, 자신감 결핍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다. 통제할 수 없는 분노, 수치감, 중독을 포함해 온갖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할 수도 있다.
자, 이제 다치고 깨진 과거를 지닌 누군가가 크리스천이 되고 성품도 예전에 비해 한결 나아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돼서 신앙적인 소속감이 특별히 필요하지 않은 이보다는 안정감과 자기절제가 부족할 수 있다. 며칠 간격으로 둘을 만난다 치자. 저마다의 출발점과 삶의 여정을 두루 꿰고 있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별 가치가 없으며 크리스천들은 높은 자기 기준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쉽다. 더 고단한 삶을 살면서 '삶의 표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들 쪽에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오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날 개연성도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의 삶이 신앙이 없는 이들에 비해 더 나을 만한 구석이 없다고 보는 게 당연하다. 박물관을 찾는 이들보다 병원을 들락거리는 이들의 건강이 비교적 더 나쁘리라고 판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101-103).
팀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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