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빠진 이는 비참하다
간단히 말해, 지옥이란 그저 무한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하나님을 떠나 자유로이 선택한 정체성을 의미한다. 마약, 알코올, 도박, 포르노그래피 중독에서 이런 과정의 '축소판'을 볼 수 있다. 우선, 붕괴가 일어난다. 갈수록 만족도가 떨어지므로 같은 쾌감을 얻으려면 더 많은 양의 중독물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고립 현상이 생긴다.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점점 더 심하게 남 탓, 환경 탓을 하게 된다. 나날이 자기연민과 자기몰입이 깊어져서 툭하면 중얼거린다. "아무도 내 맘 몰라! 다들 나만 미워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토대로 삶을 쌓아 올리면, 바로 그것이 (비록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심신을 종속시키는, 곧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행복해지는 중독 요인이 된다.
인격 해체는 더 광범위한 규모로 일어난다. 영원한 세상에서도 이 해체는 끝없이 계속된다. 고립, 부정, 망상, 자기몰입이 갈수록 심해진다. 겸손함을 완전히 잃어버리면 현실과의 연결도 끊어진다. 아무도 지옥에서 떠나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하늘나라라는 개념마저 엉터리처럼 보이게 된다.
C. S. 루이스는 판타지 소설 "천국과 지옥의 이혼 (The Great Divorce)"에서 버스를 가득 채우고 지옥을 떠나 천국 언저리에 도착한 승객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옥에 있을 때 발목을 붙들고 있던 죄들을 버리라는 안내를 받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승객들을 설명하는 루이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중독이라는 축소판에서 보았던 자기기만과 자기몰입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지옥은 투덜거리는, 그러니까 쉴 새 없이 불평하는, 늘 남을 탓하는 분위기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아직은 거리가 있다. 어쩌면 지금은 스스로를 꾸짖으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는 더 이상 그러지 못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런 분위기를 비판하거나 도리어 즐길 자아는 전혀 남지 안혹 기계처럼 끝없이 돌아가는 불만만 남게 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싹수부터 도려내 버리지 않으면 커서 지옥이 될 무언가가 자라고 있다.'
지옥에 빠진 이는 비참하다. 이 글에서 루이스는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을 설명한다. 그들의 내면에서는 교만과 피해망상, 자기연민, 남들은 다 틀렸고 멍청이라는 확신 따위가 맹렬한 불꽃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간다. 겸손은 죄다 사라지고 분별도 없어진다. 결국 자기중심성의 감옥에 철저하게 갇혀 버리고 교만은 버섯구름처럼 점점 더 거대하게 자라난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비난하는 사이에 몸과 마음은 끝없이 허물어진다. 이것의 확장판이 바로 지옥이다 (137-138).
팀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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