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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 “두려움 너머의 삶”

믿음은 비현실에서 현실로

by 일요일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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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비현실에서 현실로


반면에 다윗은 어떤 결과를 얻었는가? 어린 소년 목동이던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워 이겼다. 운이 좋았는가? 기적이었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가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5-47)


작은 소년이 큰소리를 친다. 출전 경험도 없고 나이도 체급도 맞지 않는데 뭘 믿고 이러는가 싶다. 물론 하나님이 도우시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눈감으면 믿기고 눈뜨면 말짱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이런 믿음이 생기겠는가? 당연히 하나님께 불가능은 없다고 외치지만 믿음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소년 다윗의 믿음은 매우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니 사울 왕이나 신하들, 심지어 골리앗이 보기에도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믿음이었다.


그러면 다윗이 현실 감각이 떨어져서 그랬는가? 아니다. 그는 매우 실제적인 감각을 지닌 소년이었다. 그의 대사를 보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다윗은 골리앗 앞에 서서 눈 질끈 감고 물맷돌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어디에 칼을 차고 어디에 창을 들고 어디에 단창을 메고 있는지 찬찬히 상대의 무기를 파악해 두었다. 다윗이 비현실적이어서 믿음의 객기를 부린 것이 아니었다.


또한 다윗은 양을 치면서 맹수들을 상대한 전적이 있다. 그의 자신감은 신앙은 물론이고 실전 경험에 기초한 것이었다. 사울의 칼과 갑옷을 포기하고 물매를 선택한 것도 자신의 주 종목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홀로 양들을 지키고 생존해야 하는 들판에서 끊임없이 물맷돌 연습을 해왔다. 그리고 실전에서도 놀라운 명중률을 갖게 됐다. 이것은 그저 낭만적인 상상이 아니다. 성경에 실례가 있다.


"그때에 성읍들에서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이요 그 외에 기브아 거민 중 택한 자가 칠백인데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이 없는 자더라" (삿 20:15-16)


한두 사람도 아니고 700명이나 되는 물매 던지는 사수들이 있었다. "호리도 틀림이 없다"는 말의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머리카락까지 정확하게 맞힌다'는 뜻이다. 그러면 사정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최대 90m다. 이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는가? 리우 올림픽에서 한국 양궁이 전 종목을 석권하는 기염을 통했다. 올림픽 양궁의 사대에서 과녁까지의 거리가 70m다. 거기에서 X-10을 쏘는 실력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스라엘의 물맷돌 사수들은 그보다 먼 거리에서 그것도 움직이는 목표물의 머리카락을 맞혔다.


다윗이 그날 믿음으로 아무렇게나 휙 던졌는데 성령의 바람이 불어 골리앗의 이마에 꽂힌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믿음대로 승리하리라 생각했을 뿐 아니라 연습해 온 대로 승리하리라 믿었을 뿐이다. 물론 그는 달리면서 돌을 던졌다. 이 돌이 골리앗에게 맞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오기 전에 골리앗의 창에 맞아 땅에 꽂힐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달려가면서 던져야 속도와 파괴력이 늘기 때문에 그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최선으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믿음의 모험이었다. 자신의 실력만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자신을 하나님이 도우시리라는 믿음에 근거한 모험이었다.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삼상 17:48-49).


다윗의 믿음은 비현실에서 현실이 되었다. 왜냐하면 믿음대로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최선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지면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이미 어린 나이에 체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두려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할 수 있는 것조차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려움은 현실을 비현실로 만들기 때문이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현실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두려움은 비현실적인 공포감으로 확대되어 이스라엘 전군의 전투 능력을 상실하게 했는데, 한 소년 목동의 비현실적으로 보이던 믿음은 최선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합력하여 현실적인 결과가 되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원수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원수에 대해서는 확대경으로 본다. 그래서 태산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축소경으로 본다. 그래서 별 존재감이 없어 보인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그분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시다. 두려움은 원수에 대한 확대경이며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축소경이다. 그러나 다윗은 확대경도 축소경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있는 그대로 보았을 뿐이다. 골리앗은 3m 장신에 싸움에 능한 인간으로 보았고 여호와 하나님은 만군의 주로 보았을 뿐이다. 그는 원수도 하나님도 실물 사이즈로 보았다. 다윗이 비현실적인 믿음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빠져 있는 우리가 비현실적인 관점을 갖고 살고 있는 것이다 (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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