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곳

덜 좋아하는 마음

by journee

회사 가는 게 재미있었던 날들이 있습니다. 내가 만드는 대로 적용되고, 매출이 늘고, 예산이 자유로운 프로젝트를 맡고, 몇 마디만 주고받아도 마음이 통하는 동료가 있을 때. 보통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회사가 꽤 다닐 만해집니다. 쉴 틈이 생겨 돌아보니 가장 아쉬운 건, 그 드문 순간 안에 있을 때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연차가 쌓일수록,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에 짓눌리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거든요.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는 높아지고, 무리한 야근을 하고, 그렇게 해서 성과가 나도 그게 작아 보여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한 작업이 나인 것은 아닌데, 그걸 떨어뜨려 놓는 것이 내내 너무 어려웠습니다.


나를 펄펄 끓이다가 에너지가 남김없이 날아가버린 후에야, 진짜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면 한 발짝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제 마음과 정말 닮은 한 줄을 보며, 세상에 이런 직장인 나 혼자는 아니구나 싶어 웃음이 났습니다.


일이 곧 제 기분이 되었고 일에 끌려다니는 인생을 한동안 살았습니다. 당연히 피폐해졌고 나라는 존재를 잃어갈 뿐이었죠. 세상은 그걸 열정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예쁘게 표현해 주어서 긴 시간을 보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젠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서 회사와의 거리두기가 필요하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사의 날씨에 내 상태를 맡겨버리면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죠.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려면 덜 좋아하는 마음이 필요하더라고요. 이것을 깨닫는 건 온전히 저의 몫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나의 인생을 구원해주지 않아요. 그러니 내 마음의 날씨는 내가 챙기는 겁니다.

- 오하림, <카피라이터의 일>


좀 더 젊은 날의 저에게 한 달간의 방학이 있었다면, 또 새로 나온 툴을 배우러 다닌다고 설쳤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학의 사전적인 의미대로 학업을 던져두었습니다. 직장인으로 살 날이 아직 길다면, 일과 온전히 분리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요.


출근하는 일상으로 돌아가면 좀 더 넓은 범위의 브랜딩 업무를 맡게 됩니다. 잡부로 살면서 새로운 일을 배워서 하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디자이너 출신이 카피라이팅 영역까지 보는 게 흔히 있는 상황은 아닐 겁니다. 긴긴 인생을 보내고 백발이 된 노인에게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는 영화 <업>이 떠오르네요. 평생을 살았던 공간에서 처음 보는 세상으로 날아가며 주인공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설레는지, 걱정되는지, 저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충분히 쉬어서인지 다행히 화는 나지 않네요. 지난 10년간 해 온 일이 첫 번째 챕터라면, 앞으로 할 일들이 다음 챕터로 이어질까, 궁금한 마음이 가장 큽니다. 그리고 다시 10년쯤 지나야 답을 낼 수 있겠죠. <업>은 주인공 부부가 꿈에 그려온 파라다이스 폭포 위에 놓인 집을 비추며 막을 내립니다. 10년 뒤에도 이 일을 좋아하는 마음이 한 줌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게 저에게는 오래도록 바라던 장면일 것 같습니다.


또 새로운 점들을 이어갈 상황에서 기억하고 싶은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관대함'. 처음 해보는 일을 잘 못하는 건 당연합니다. 배워서 해내면 남들이 칭찬해 줄 수도 있는 건데, 아니라고 손사래 칠 필요 있나요. 그러니 부담은 좀 내려두고, 빛나는 순간에는 함께 웃기를. 그리고, 아끼는 동료가 힘들어할 때 다독여 줄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나중에 다시 꺼내봤을 때 나에게도 조언이자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의젓하게 쓰려고 노력했는데, 과연 도움이 될지는 미래의 내가 판단해 주겠죠?


때로는 가까워졌다가 때로는 멀어지면서, 10년 뒤, 20년 뒤에도 창작하는 일 곁에 있기를 바라며.


- 2025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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