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나

잡부인 것도 특기가 되나요?

by journee

나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회사 면담에서 받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아 당황했습니다.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오게 되네요. 그동안 여러 회사를 지나오면서, 어렵게 업무 조정 요청을 해 본 적이 두어 번 정도 떠오르는데, 제대로 반영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는 건 결국 회사 밖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걸까요?


제가 좀 더 저연차였을 때는 이따금 회사에서 ‘이런 일 해보고 싶습니다’ 손 들고 나서서 해본 적이 왕왕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 때문인지 R&R이 불분명한 새로 생긴 프로젝트를 떠맡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영역을 배우고, 프로세스를 만들고, 맨땅에 헤딩하듯 외주 업체나 솔루션을 수소문하고, 그런 과정들의 반복이었죠. 그런데도 일이 굴러가다 보니 세월이 흘러 완연한 제너럴리스트가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이런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저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참 난감해요. 그래도 업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잡 포지션에 기반해 설명해 보자면, 패키지 디자인과 사진 촬영 기획을 포함한 브랜드 디자인 업무, SNS 콘텐츠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콘텐츠 마케팅 업무, 캠페인 키비주얼을 만드는 아트디렉팅 업무, 마이크로사이트 기획과 디자인,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서 이렇게 네 가지 포지션을 옮겨 다니며 업무를 해왔습니다.


했던 업무들을 쭉 나열해 보니, 달라 보이는 일끼리도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어서 스위치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편집 디자인과 웹 디자인은 위계와 레이아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고, SNS 콘텐츠와 캠페인 키비주얼은 트렌드 리서치에 기반해 스토리보드를 짠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물론 파고 들어가면 디테일한 부분은 당연히 다릅니다. 인쇄랑 화면 디자인이 어떻게 똑같겠어요. 최소 폰트 사이즈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데요. 사실 그동안은, 이렇게 새로운 영역을 배워서 하는 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대학생처럼 새로운 과목을 듣는 기분이 조금은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종국에는 결과물이 비주얼로 이어지는 업무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연차가 올라가면서 지표를 볼 일도 많아지고, 기획과 카피라이팅 영역까지 봐야 하는 날이 오게 되었습니다. 정체성이니, 진짜 하고 싶은 일이니, 하는 고민이 스멀스멀 자리를 잡은 것도 이때부터였어요. ‘원래 회사는 올라갈수록 그런 거야,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다닐 수는 없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권한이 많아진 거니까 더 좋은 거 아니야?’ 조언인지 아닌지 모를 말들 사이에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주어진 상황에 몸을 맡긴 채 시간이 흘렀습니다. 내 안에 주체성 내지는 열정 같은 것들이 서서히 꺼져가는 걸 느끼고 있었죠. 그럼에도 회사를 계속 다니기로 선택한다면, 지금 위치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미를 찾아야겠다, 그게 쉬는 동안 깨달은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해온 일의 스펙트럼이 직무적으로는 제너럴리스트로 보이지만, 맡았던 서비스나 브랜드의 관점에서는 관련된 대소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일종의 스페셜리스트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한편에 인상이 남는 좋은 브랜드를 만드는 일은 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했을 때부터 오래도록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합니다. 스튜디오가 아닌 인하우스를 선택한 것도 브랜드가 커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고요.


좋은 브랜드를 만드는 데 디자인은 한 부분일 뿐이고, 보이고 읽히고 들리는 모든 것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해하는 연차가 되었습니다. 디자이너가 이런 것까지 해야 되냐며 씩씩거린 세월도 있지만, 시야를 넓힌다고 해서 제 뿌리가 디자이너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조직에서 제게 이런저런 일을 맡긴 건 그저 일이 더 잘되게 하기 위함이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라고 한 것은 아닐 겁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미지의 서울을 보며,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건 누구에게나 끝없는 숙제구나, 싶었습니다. 삼십 대에 삼수 끝에 대학에 가는 미지, 중년이 되어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미지의 엄마, 환갑이 넘어 글 읽는 법을 배우는 식당 주인 할머니까지. 내가 나로 살고 싶다면 스스로 헤쳐나가야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회사라는 공간은 타인에 의한 결정이 유난히 더 많은 곳이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좀 더 내 의지를 담아 일할 때 나를 잃지 않을 수 있겠죠. 그럴 수 있는 환경과 행운들이 따라주기를 기도해 봅니다.


디자인에서 기획까지, 커리어의 망망대해를 지나고 있는 저에게 도움을 준 책의 한 문구를 되새기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디자인’의 개념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사용자 입장에서 기능을 고민하고 경험을 의도하는 것.
2) 1을 조형적, 미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
3) 1, 2번을 우리답게 지속하는 것

1을 기획, 2를 디자인, 3을 브랜딩이라고 하겠습니다. 기획이 꼼꼼하게 잘되면 디자인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또 기획과 디자인이 잘되고 있다면 이미 브랜딩도 잘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출발점인 기획이 전부인 것입니다.

- 조수용, <일의 감각>


내가 일하는 브랜드가 더 자랑스러워질 어떤 날을 그리며, 잡부 혹은 올라운더의 삶을 당분간은 응원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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