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삿포로와 라디오

일을 통해 보는 세상

by journee

혹시 여행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 보신 적 있나요? 저는 여행을 가면 자주 아픈 편이기도 하고, 체력도 꽝이라 여행을 그다지 즐기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살다 보니 여행에 별 감흥이 없는 다른 사람을 우연히 만나 결혼까지 했습니다. 여행과 점점 멀어지는 라이프스타일이 될 수밖에요.


한 달을 쉰다고 하니, 어디 유럽 여행이라도 가세요? 하는 반응이 제일 많았습니다. 아쉽게도 그런 장기 계획을 세우고 쓴 휴직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을 잠시 떠나고 싶다는 결기는 있었지만요. 더울 때 더운 나라 가기 싫다는 제 말에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가 삿포로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찾아보니 다른 일본 여행지보다는 선선하고, 도시와 자연에 모두 볼거리가 있었습니다. Gemini에 몇 줄 쳐보고 충동적으로 비행기 티켓과 호텔을 예약했습니다. 이제와 다행이지만, 일본 대지진 예언이 있었던 때라 표가 저렴했던 것 같네요.


여행을 잘 다니지 않는 제가 여행에 대해 어떤 감상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써야겠다 마음먹은 건 한 쇼핑몰 1층에서 본 라디오 스튜디오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여행 기간 내내 복합 쇼핑몰인 코코노 스스키노 고층에 붙어 있는 숙소에 묵었는데요, 이 쇼핑몰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코너에 작은 라이브 부스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처음 도착했을 땐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려 그냥 스피커에서 일본어 방송이 나오나 보다 했는데, 돌아보니 유리 부스에서 DJ 세 명이 라이브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행복한 기분을 만들어준다는 마트 CM송이나, 백화점 녹지 공간에 깔리는 새소리는 들어봤어도, 쇼핑몰에서 라이브로 방송을 들어보는 건 안내 방송 말고는 처음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좀 더 가까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할까요. 잘 모르는 사람이 하는 버스킹 공연에도 잠깐 멈춰서 들어보게 되는 힘이 있는 것처럼요. 쇼핑센터에서 가장 북적이는 입구 쪽에 위치한 벤치, 사람들이 모여 앉아있는 현장 사이로 흘러나오는 생동감 있는 이야기.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호텔 로비로 가는 길에 그 시퀀스를 매일매일 보면서도 매일매일 신기해하니, 같이 간 친구는 저를 신기해했습니다.

*COCONO SUSUKINO, <MID.α STUDIO>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저는 집 꾸미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가, IT에서 백화점 업계로 이직하며 공간 경험에 대한 시야를 열게 되었습니다. 오프라인만이 줄 수 있는 감각이 있다는 걸 백화점 서비스의 버벌과 비주얼을 정리하면서 배웠죠. 그 시간이 없었다면 제가 이 쇼핑몰에서 옷도 음식도 아무것도 팔지 않는 네모난 공간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진 않았을 겁니다.


맑은 날 둘러본 청의 호수와 라벤더 밭도 무척 아름다웠지만, 편의점과 돈키호테 매장 구경도 그에 맞먹을 정도로 재밌는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패키지 디자이너로 일한 세월도 있는지라, 습관적으로 포장지를 요목조목 뜯어보게 되더라고요. 그중에서도 눈에 오래도록 담아 둔 건 홋카이도를 상징하는 새, 시마에나가(シマエナガ) 일러스트가 그려진 키바나 박스. 물론 귀엽기도 하지만 이 역시 요즘 한국 패키지에서는 잘 안 보이는 클래식한 수채화 감성이라 더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래된 사진첩을 열었을 때의 반가움과 그리움 같은 것이 담긴 작화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쿠키는 다 먹었지만 박스는 고이 접어 파일에 끼워두었습니다. 휴양지로 떠났던 작년 여름 여행보다 삿포로 여행이 왜 더 재미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날씨도 음식도 좋았지만 영감을 얻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더군요.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채널에 '일을 대하는 마음'을 주제로 한 토크가 있습니다. ‘워크와 라이프는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일과 성과, 가치관과 기억이 모여 정체성이 된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구절들이 맴돌아 영상을 다시 봤습니다. 창작을 업으로 하는 이상, 일과 일상이 무지개떡처럼 붙어있는 이 생활을 즐겨야만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면면을 어떻게 쌓아가며 살아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요. 부디 일을 통해 제가 알게 되는 세상이 더 넓어지면 좋겠습니다. 과자 박스에 인쇄된 그림을 누가 그렸을까 궁금해하며 굳이 굳이 찾아본 이 여행처럼요.

매거진의 이전글세 번째 수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