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수박

여유는 만들어야 생긴다

by journee

수박에 대한 첫 기억은 7살 무렵 외할머니 댁에서 시작합니다. 할머니 말로 오봉(넓은 쟁반) 위에서 서걱서걱 잘라지던 세모난 수박. 여름 방학 때마다 외가에 놀러 가면 며칠 내리 수박을 먹었습니다. 독립하기 전, 가족들과 살 때는 일 년에 한두 번 꼭 먹던 수박이 자취를 한 뒤로는 찾아 먹기 참 힘들더군요. 이따금 카페에서 수박 주스나 사 먹었죠.


휴직 후 장을 보러 간 마트, 수박 앞에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수박 한 통을 내 손으로 사 본 적이 없네? 결혼하고 세 번째 여름인데?' 작은 과일들은 곧 잘 사 먹었는데, 수박은 왠지 엄두가 안 났달까요. 그렇게 무거울 줄도 모르고 혼자 낑낑대면서 집에 들고 와 저울에 달아보니 6.8kg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세모지게 썰린 수박은 보기 힘들어지고, 네모나게 썰어 통에 보관해 먹는 것이 대세가 된듯합니다. 식구도 줄고, 옆집과 나눠 먹지도 않아서일까요? 수박 깔끔하게 자르는 영상을 몇 개 보고, 겉면을 빡빡 씻고, 장갑을 끼고 야심 차게 집도에 들어갔습니다. 똥손도 할 수 있다는 영상을 보고 따라 했는데, 역시 처음이라 그런지 영상처럼 반듯하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좀 더 과감하게 둥근 부분들을 잘라내 직육면체를 만드는 게 포인트인데, 사다리꼴이 되어서 결국 삐뚤빼뚤해졌습니다. 자투리 부분까지 다 파내고, 껍질은 조각내 정리하고 나니 훌쩍 지난 시간. 테트리스처럼 넣지는 못했지만, 큰 용기 두 개에 가득 담긴 수박을 보니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수박이 남아 있는 냉장고를 며칠 동안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열었습니다. 장마 지기 전에 산 수박이라 정말 맛있었거든요. 남편도, 동네 친구도 이렇게 단 수박 드물다고 좋아했습니다. 칭찬받으면서 강화되는 강아지 훈련처럼, 저의 첫 수박 자르기도 좋은 기억들로 한 겹 덧씌워진 것 같습니다. 막상 해보니 별거 아닌데, 그동안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엄두를 못 냈을까. 물리적인 시간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거겠죠. 여유는 만들어야 생긴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름엔 수박도 달고, 봄에는 참외도 있고, 목마를 땐 물도 달지 않나. 그런 것 다 맛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한강 작가의 남편이 아이를 낳자고 설득했던 말속에도 등장했던 여름 수박. 작가의 말대로 설탕처럼 부스러지는 붉은 맛을 떠올리며 이 여름 두 번째 수박을 샀습니다. 비 온 뒤라 첫 수박보다는 맛이 덜했지만 네모 썰기 실력은 처음보다 나아졌어요. 복직 후에도 여름이 가기 전 한번 더 먹어야겠습니다. 더 달콤할 다음번을 기대하며, 수박 잘라먹을 에너지 정도는 남겨 놓고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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