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현대 대구 오픈 캠페인 에필로그
지난 한 해 제가 회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프로젝트는 더현대 대구 오픈 캠페인이었습니다. 리뷰를 남겨야겠다 마음먹었을 때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영화가 있었는데요, 무려 8년 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봤던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그레이트 뷰티’입니다. 대학생 시절 내 취향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 영화가 불쑥 떠올랐던 이유는 ‘두번째의 어려움’이라는 주제 때문입니다. 이 영화 주인공은 40년 전 대박을 터트린 소설 한 권을 끝으로 더 이상 작품을 쓰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크게 성공한 더현대 서울에 이어 두번째 더현대를 만드는 입장에서, 회의와 조바심이 섞인 그 마음이 정말 공감이 갔거든요. 물론 저는 절대 바꿀 수 없는 오픈일이 정해져 있었다는 게 큰 차이점이긴 합니다. 이 글은 그 불변의 오픈일을 향해 달려간 여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대구는 3사 백화점이 모두 있는 지역인데요, 최근 몇 년간 동대구역에 위치한 신세계 백화점 중심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대구점 리뉴얼을 알리는 기사 제목들만 살펴보아도 그동안의 분위기를 알만하죠.
'에르메스·샤넬 보고있나'...더현대-신세계 대구서 두번째 빅매치
컬쳐와 콘텐츠로 승부수를 띄운 더현대 라인업답게, 더현대 대구 프로젝트에는 글로벌 아티스트들이 참여했습니다. 천 평이 넘는 9층 공간 전체를 문화광장으로 바꿔놓은 하이메아욘을 비롯해, 1층에 신선한 분위기를 불어넣은 대형 조형물의 주인공 시릴란세린, 어느 각도에서나 그 조형물이 돋보이도록 프레임 형태의 보이드를 설계한 버디필렉, 마지막으로 빛과 여백을 활용해 지하 1,2층 공간을 그림처럼 만들어낸 시나토까지. 리뉴얼이지만 신규 점포에 준하는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꽤 많은 공력이 들어간 프로젝트였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이 멋진 공간이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페이드아웃 되지 않고, 서울에서도 오고 싶은 공간이 되도록 널리 잘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브랜드 필름과 웹사이트를 만들고, 다양한 온오프라인 매체에 집행되는 이미지를 컨트롤하는 것까지. 디자이너가 아닌, 아트디렉터이자 PM으로서 역할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킥오프 단계에서 가장 큰 고민이었던 건 ‘더현대 서울 캠페인과의 연결성을 얼마나 가져가야 할까’였습니다. 형을 무작정 따라 하지는 않으면서 닮은 구석도 있어야 한다니. 역시 둘째는 서럽습니다. ‘Create the Future’는 이런 맥락에서, 더현대 서울의 ‘Sounds of the Future’를 좀 더 주체적인 방향으로 재해석한 슬로건입니다. 개인적으로 당시에는 다소 멀멀하게 다가와서, 비주얼을 압도적으로 특이하게 뽑아서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파급력 있는 광고를 만들겠다고 하면, 가장 먼저 고려하게 되는 옵션이 빅모델이나 인플루언서를 쓰는 것인데요, 빅모델이 하는 백화점 광고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역사가 긴 유통업, 특히나 백화점에서는 빅모델 기용에 보수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무게감 있는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는 백화점업의 특성상, 이 공간을 한 인물이 대표하도록 만드는 것이 리스크가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빅모델의 부재는 저에게 큰 산처럼 느껴진 부분이었습니다. 마켓컬리에서 브랜드 인지도를 크게 개선한 전지현 광고를 직접 경험했던 터라, 그 틀에 갇혀있었던 것 같아요. 이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건 결국 타깃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 더현대 서울 인사이트의 한 구절을 신조로 삼아, 더현대가 집중하는 MZ 세대, 그중에서도 즐길거리에 목마른 경상 지역의 힙스터들이 반응할만한 것을 찾고자 했습니다.
아트 필름과 뮤직비디오까지 폭넓은 리서치를 하며 찾아간 답은 3D 캐릭터였습니다. 미분화된 요즘 힙스터들의 취향을 표현하려면 스타일리시한 모델 몇 명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페르소나라면 3D로 만들자’에 이르게 된 것이죠. 너무 실험적인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으나, 자신의 페르소나를 3D 캐릭터로 만드는 것에 익숙한 MZ 타깃이라면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더현대 대구의 브랜드 필름은 이 개성 넘치는 페르소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미지의 공간을 탐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이엔드 브랜드에서 내놓은 3D 브랜드 필름 사례들을 살펴보면, 멋있지만 어딘가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것들이 왕왕 있습니다. 저는 더현대 대구의 브랜드 필름은 힙하지만 따뜻한 분위기로 비추어지기를 원했습니다. 더현대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사람을 향한 공간'이니까요. 이 모호한 '따뜻한 힙함'을 구현하기 위해 캐릭터 의상이나 행동에 대한 비주얼 가이드를 구체화했고, 그 가이드를 한층 더 풍성하게 해석해서 적용해 주신 감독님 덕분에 의도한 범위 내에서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영상에 둥둥 떠다니는 오브젝트들의 정체에 대해 부연하자면, 새로운 행성(더현대 대구)에 살고 있는 원주민 같은 개념입니다. 이곳에 놀러 온 캐릭터들을 환영해 주고, 교감하는 일종의 토템이죠. 이 토템들은 더현대 대구 공간 내외부를 장식한 그래픽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영상만 봤을 때는 뜬금없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실제 공간을 방문하면 건물 외관을 비롯한 곳곳에서 마치 영상 속 토템이 튀어나온 듯한 연결성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토템 그래픽 개발과 오프라인 적용은 별도의 PM분께서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제게 특별했던 또 한 가지 포인트는, 웹사이트를 직접 디자인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IT 회사에 계속 있었다 보니 웹디자인을 외주로 진행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업체에 전달할 화면 기획서와 비주얼 가이드를 만들면서, 그냥 바로 디자인 얹히는 게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요, 매우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깨닫게 해 준 이상적인 협업을 경험했습니다. 그래픽 모티프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온-오프라인에서의 비주얼 경험이 연결되었고, 디테일하게 설계된 인터랙션이 사용성을 더 높여주었습니다.
https://mmpx.kr/work/thehyundaidaegu
저는 그동안 대부분의 프로젝트를 기획자와 디자이너 2인 페어 구조로 일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만드는 포지션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큰 규모의 프로젝트에서 다른 디자이너에게 디렉션을 주는 입장이 되니 초반에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쉽게 전달할 수 있을지, 너무 좁지도 넓지도 않은 가이드의 적정선은 어디쯤인지 등등을 고민하며 좀 더 지혜롭게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간 것 같습니다. 저도 아직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 고민하고 소통한 만큼 좋은 결과가 따라왔던 것 같아요.
끝으로,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의 격차가 심각해지고 있는 시대에 이런 과감한 선택을 한 현대백화점에 응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더현대 대구가 앞으로 대구 지역을 넘어 경상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2년 12월 릴리즈한 프로젝트를 쓰다가 덮다가 하다가 이제야 기록합니다. 글을 쓰며 기억을 더듬어보니 자잘하지만 꼭 필요한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계약서 쓰기, 도메인 구입하기, 층별 브랜드 번호 검수하기... 건물 사진 찍는다고 리프트도 탔어요ㅋㅋㅋ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돌아보니 성장의 시간이었다는, 진부한 이야기로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