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by 문강

이탈리아에 가고 싶었다. 로마에 가고 싶었다. 밀라노에 가고 싶었다. 레지오 디 칼라브리아의 해변에 가고 싶었다. 피렌체에 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살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갈 수 있었다. 어느 날 은사님이 나에게 물으셨다. 이탈리아에 지인의 회사에 취직할 생각이 있냐고 물으셨다. 한국에서 지내는 게 너무 힘들다면 잠시 떠나 있으라고 말하셨다. 가고 싶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고 싶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사랑하는 나의 벨로와 벨라가 없었더라면 당장이라도 가고 싶었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가보고 죽고 싶었다.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무화과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그가 집에 왔을 때 버려진 무화과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다. 휴대폰을 끄고 생활하니 마치 삶이 깊은 바다에 침식된 것처럼 조용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허망한 나의 보금자리에서는 더 이상 살아있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벨로와 벨라가 떠나간 자리에는 오롯이 고요함만이 남아있었다. 그 고요함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죽기 전 꼭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에 가고 싶었다. 벨로를 좋은 곳에 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곳에 가도 나의 삶을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기 전 그곳에 다녀온다고 하더라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돌아와도 더 이상 나를 맞아주는 벨로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이 집에서 싸늘한 시채로 발견되면, 그는 아마 나를 화장시킬 거고 어딘가에 나를 뿌린다면 그때 벨로랑 같이 뿌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에 다녀올까 고민했지만, 결국 마음을 접어버렸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먼 타국에서 죽을까 고민했지만 그러면 뒤처리가 너무 번거로울 거 같았다. 그 뒤처리는 생판 남인 그가 아닌 법이라는 테두리에 가족으로 묶여있는 죄 없는 나의 누나가 해야 할 텐데 그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여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찾아가 왜 나를 버렸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본인들이 낳은 결과물인데 왜 그 어린아이를 그렇게 방치하고 방목했냐고 따지고 싶었다. 기억도 안나는 아기 시절부터 할머니한테 길러진 나는 16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완전하게 혼자가 되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누구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서야 누나와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다. 버려진 형제에 대한 동정심이었을까 아니면 죄책감이었을까. 그게 무엇이든 단지 나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벅차올랐다. 티 없이 맑게 자란 누나가 오히려 밉지 않았다. 나와 비슷하게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면 조금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남은 핏줄만큼은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이 묘하게 안정감과 안도감을 주었다. 어쩌면 이런 게 진정한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바라는 거 없이 그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일까.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과 연애를 했었다. 성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안아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침대에 누워 작은 온기를 나눌 수 있다면 만족했다. 떠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미련 없이 보내주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사랑한 적 없기에 그들이 나에게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 자신들을 사랑한 적 없다고 말하지만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나는 그들에게 주었다. 매 순간 나는 진심이었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닿지 않았다. 비겁한 나는 그들을 사랑한 적도 없으면서 사랑이라고 자신을 속이고 그들을 속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8년 전 10월의 어느 날 그를 만났다. 대낮부터 술에 절여져 이태원의 어느 골목에서 뒹굴고 있던 나를 그가 부축하여 주소를 물어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라도 상관없이 그저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하지 않고 타인을 돕는 사람이었다. 넓은 등판에 좋은 냄새가 나던 그에게 연락처를 물었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을 보며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지금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빠르게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인이 주는 호감을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던 나는 그렇게 나에게 호감을 표하는 모든 사람들과 어렵지 않게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스스로를 잘 포장하여 적당한 거짓과 진실을 섞어서 버무리면 작은 호감 혹은 호기심을 연애감정으로 발전시키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적당히 몇 달 만나고 헤어지려고 생각했었다. 좋은 사람인건 분명하지만 내가 그리던 오래오래 나를 사랑해 줄 위인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와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데이트 어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전하던 그의 핸드폰 알림 창에 빨간 알림이 슥하고 떠올랐다. 아, 역시 그는 절대 내가 바라던 그런 사람은 아니구나. 여실히 깨달았다. 어차피 슬슬 질려가고 있던 순간이라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당연히 쿨하게 그렇게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집착은 대단했다. 절대 나를 놓지 않았다. 시답잖은 변명을 늘어놓는 그를 보며 조금 귀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서 그와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서울로 올라와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그를 보며 나는 딱히 응원하지도 그렇다고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를 사랑할 뿐이었다. 그와 다투는 시간이 길어지고 마음이 지쳐서 헤어지고 싶어도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이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집이었다. 나에게 평범한 부모님이 계셨더라면, 그래서 내가 돌아갈 곳이 있었다면 나는 그와 끝낼 수 있었을까. 그는 돌아갈 곳이 없는 나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쉽게 나를 구속했고 휘둘렀다.


이대로는 안될 거 같아서 돈을 저축하기 시작했다. 다시 작은 반지하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숨 막혔다. 자유를 갈망하는 작은 새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어도 찢어진 날개로는 그 어디도 멀리 날아갈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 시절부터 이탈리아로 떠나고 싶었다.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를 옥죄이는 쇠사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따뜻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을 품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에게서 느껴지는 타인의 체취가 역하게 느껴졌다. 그가 나에게 뻗는 손이 더럽게 느껴졌다. 머쓱하게 자리를 피하며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성욕을 풀 때가 없던 그는 그런 순간이 많아질수록 밖에서 누군가를 품고 들어왔다.


그는 내가 실수하는 모든 순간들을 경멸했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세뇌하듯이 말했다. '너는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너는 부족한 사람이야', '나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도대체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야', '왜 이런 것도 하나 똑바로 못해서 나를 귀찮게 만들어.'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가 말한 것처럼 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도태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가 주는 먹이를 기다리는 짐승처럼 무기력하고 나약해지고 있었다. '얼마 벌지도 못하는 일 때려치우고, 그냥 학교나 다녀. 석사 따고 나면 내가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은 되겠지.' 그가 시키는 데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에 집중했다. 다만, 언제라도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도록 프리랜서로 받는 디자인 외주만큼은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주는 생활비는 담배 한 값을 사더라도 모두 그에게 보고해야 했기에 그가 모르는 비상금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언젠가 그에게 버려지면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순간 비상금이 도움이 되리라.


어느 날 그가 집으로 강아지 두 마리를 데려왔다. 벨로와 벨라라고 이름 지었다. 포메라니안과 보더콜리였다. 강아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분명 그 어느 순간보다 소중했다. 아이들을 데려오고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내줄 테니 다녀오라고 말했다. 유학이라도 다녀오면 다시 돌아와서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냐고 물었다. 한국에 있는 대학원은 자퇴 혹은 휴학을 하고 그토록 노래 부르던 이탈리아에서 유학이나 하고 오라고 말했다. 가고 싶었다.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내가 돌아오면 높은 확률로 아이들이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는 강아지들을 모두 버릴 것이다. 어쩌면 키우기 귀찮아지기 시작해서 나를 멀리 보내고 아이들도 치워버리려고 한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이미 나는 그 강아지들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돈을 받아서 유학을 가는 것도 불편하고 불안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돈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먼 타국에서 어떻게 되는 걸까. 물론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생활비야 벌 수 있겠지만, 비싼 학비와 만만치 않은 월세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지금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도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내가 떠난 빈자리를 그는 다른 누군가로 채울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의 옆에 머물고 있어도 그는 내가 그곳에서 졸업할 때까지 모든 돈을 내줄 것인가. 나는 그에게 빌붙어서 기생하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스폰이라도 받는 것처럼, 돈으로 그는 나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사는 그 순간부터 나는 그와 동등한 관계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아랫사람 부리듯이 나를 부렸고 나는 군말 없이 그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결국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탈리아에 가지 않았다. 그의 돈으로는 갈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도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소중했다. 그는 금융업에서 종사하고 있었다. 그의 고객들은 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집으로 선물들이 날아왔다. 비싼 한우부터 시작해서, 캐시미어 스웨터, 술, 귀한 차 등 종류를 가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자신보다 10살은 어린 그에게 머리를 굽히며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인을 도울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스스로가 아무리 피곤하고 바쁘고 어려워도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바빴다. 언제나 일에 시달렸다. 그가 그렇게 바쁘면 바쁠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분명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매일, 매일 나는 더 외롭고 쓸쓸했다.


어느 날 그가 집에서 나간다고 통보했다.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꾸 잘못 없는 나한테 괜히 트집 잡아서 시비 걸고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다고 더 이상 이렇게 같이 지내는 건 서로에게 못할 짓이라고 말했다. 당시의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혼자 울면서 잠드는 밤이 늘어났다. 그의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불안했다. 관련도 없는 나를 잡고 모든 게 내 탓이라고 말하며 소리치는 그를 받아주기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집을 떠난다고 말했을 때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살고 있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오피스텔을 잡았고, 그곳에서 생활할 거라고 말했다. 당황스럽고 황당했지만 그러라고 말했다. 어차피 싸워서 이길 수도 없었고 네가 나한테 아무리 히스테리를 부리고 짜증을 내고 화를 내도 좋으니 제발 나를 혼자 두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구걸할 수도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아련한 우리의 사랑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가끔 그를 만나면 느껴지는 낯선 사람의 체취와 그의 차 옆자리에 타면 느껴지는 생경한 냄새를 모를 수가 없었다. 알고 있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그에게 따지고 싶지 않았다. 사실을 확인하고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언제 헤어지자고 말할지 기다렸다. 어느 날은 기다리다, 기다리다 울면서 그에게 헤어지자고 발악하듯 말했다. 소리쳤다. 제발 내 인생에서 꺼지라고 애원했다. 너 없는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네가 내 옆에 있는 삶 보다 더 나은 삶이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제발 그만하자고 부탁했다.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내가 피 말라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서서히 내가 죽어가는걸 그저 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죽고 싶었다. 더 이상 죽음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찾아올지 모르는 막연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찾아 나서고 싶었다. 그 편이 훨씬 수월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는 어쩌면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그의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 또한 나에게 있어서는 사랑이었다. 미련 같은 게 없어진 지도 오래되었다. 사랑하는 강아지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부족하고 피폐한 나와 지내는 것보다 지금이라도 보다 건강한 주인을 만나서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세상은 너무 편협하고 작아서 저 작은 생명들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누군가가 선물해 주길 바랐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바다가 보고 싶었다. 원 없이 바다를 보고 돌아오니 벨로가 죽어있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무섭다고 말하고 싶었다. 제발 내 옆에 있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손을 잡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예전처럼 따뜻하게 안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를 끝없는 고독으로 몰아넣지 말아 달라고 하고 싶었다. 현재 너의 옆에 다른 사람이 있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벨로가 떠나고 며칠이 지나 집으로 찾아와 죽음을 접한 그는 나에게 화를 내며 나를 몰아세웠다. 벨로의 죽음이 나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내가 아무리 가라고 꺼지라고 말해도 며칠은 나와 함께 지내주길 원했다. 단 하루라도 나와 함께 잠들면서 팔베개를 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괜찮다고 안아주길 기대했다. 그는 그렇게 집을 떠난 이후로 단 하루도 나와 보내지 않았다.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벨라를 안고 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더 이상 내 옆자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옷방 제일 구석에 있는 서랍을 열어서 그동안 모아놨던 약들을 모두 꺼냈다. 이렇다 할 유서는 남기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공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믹서기에 그동안 모아놓은 모든 약을 털어 넣고 물을 부어서 모두 갈아버렸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컨튼을 모두 걷었다. 오랜만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니 현기증이 일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담배를 마저 피우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벨로. 사랑하는 벨로. 지금 만나러 갈게. 나의 벨로.


안녕. 내가 가장 사랑했던 나의 6월. 너는 나의 영혼이었어. 보잘것없는 나의 삶에 내가 가진 모든 것들 중 너는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어. 그 무엇보다 눈부시고 따뜻했어. 어떤 찬사로도 나는 너를 표현하지 못할 거야. 마치 태양처럼 빛나던 너의 옆에서 너를 더 밝혀주지 못해서 항상 미안했어. 그게 언제나 죄스러웠어. 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믿으며 너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싶었어. 태양열에 날개가 녹아 하늘에서 추락해 바다에 빠져 익사한 이카루스처럼 네가 비추는 태양빛에 몸을 맡기고 너라는 바다에 잠겨 죽고 싶었어. 너의 이름처럼 너는 나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고결한 6월이었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깨달았어. 더 이상 너의 옆에는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야. 네가 찾아 떠난 행복이라는 세상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나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어. 그동안 네가 함께 짊어지고 있었던 나의 불행은 모두 내가 다시 가져갈게.


사랑하는 나의 준아. 우리 다음 생에는 부디 만나지 말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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